민소픽 노동자 열전

[노동자 열전⑭] 경비노동자 윤석주 “한 해에 해고를 두 번이나 당했어요”

교과서공장, 섬유공장, 구두가게, 건설현장, 택배 등 거쳐 선택한 마지막 직업 ‘경비’

경비실에서 일하고 있는 경비노동자 윤석주 씨 ⓒ윤석주 씨 제공

“모레부터는 같이 일하기 어렵겠습니다.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비노동자 윤석주 씨는 지난해 11월 말 용역회사로부터 갑작스럽게 계약 해지 통보받았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윤 씨가 일하던 아파트 용역회사가 12월부터 바뀐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신이 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니던 용역회사 관리부장이 다시 고용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이력서도 냈고, 면접도 무사히 치렀다.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윤 씨는 앞이 캄캄해졌다. 내일까지 출근할 곳을 알아보지 못하면 조기취업수당 600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없는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윤 씨는 이곳에서 일하기 전에 실업급여를 2개월 정도 받다가 일을 시작한 지 7개월이 지났고, 5개월만 더 일하면 조기취업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갑작스런 해고 통보로
600만 원에 이르는 조기취업수당을
공중에 날릴 위기에 처하다


“이런 사정은 생각조차 안 하고, 무조건 자른 거예요. 부랴부랴 기흥구 노인복지회관 일자리센터장님을 통해 수소문해 일자리를 구했어요. 나중에 들으니 하루라도 고용이 단절되면 조기취업수당을 받을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용역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경비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서 화가 났어요. 더구나 이런 일이 1년에 두 번이나 반복된다니 정말 화가 많이 났어요.”

경기도 김포시 한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노동자가 눈을 치우고 있다. 2020.12.13 ⓒ김철수 기자

윤 씨는 이런 일이 있기 10개월 전인 지난 1월 말에도 일하던 아파트에서 동료 아홉 명과 함께 해고됐다. 경비노동자와 용역회사의 계약이 끝났고, 아파트와 용역회사와의 계약도 끝나면서 새로운 용역회사에선 이들을 고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도 계약 만료 기간 하루 이틀을 남겨두고 경비원들에게 통보해, 새 직장을 구할 틈도 없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1년에 두 번 연속해서 일어난다는 것이 경비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10년차 경비노동자이자, 용인 경비노동자협의회 회장으로 일하는 윤석주 씨를 지난 24일 만나 경비노동자들의 애환과 노동자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동료 9명과 함께 갑자기 해고되며 알게 된
경비노동자들의 ‘파리 목숨’ 같은 현실
용인 지역 아파트 경비노동자 가운데
55.2%가 6개월 이하 단기 계약직


지난해 1월 말 있었던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는 경비반장이던 윤 씨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열심히 일한 대가가 과연 이런 것인지, 속도 많이 상했다. 기간제 계약직이긴 했지만, 고용 승계가 계속 이뤄졌고, 갑작스럽게 해고가 될 거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해고된 분 가운데는 70대 노동자도 계셨어요. 그 아파트에서만 10년 넘게 일한 분이에요. 10년 넘게 근속하신 분을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하루아침에 잘라버린 거예요. 더구나 그분은 아내가 병으로 입원해 계셔서 경비노동자로 일해서 버는 돈 가운데 150만 원 가량이 매달 병원비로 나가는 분이었어요. 이런 어려운 사정도 다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경기도 아파트 지역별 근로계약기간 ⓒ2021년 경기도 아파트경비노동자 노동인권보호 및 권익신장사업 최종 보고서 중에서

이들은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잘려나가면서 경비노동자가 처한 초단기 계약직의 현실이 무엇인지 여실히 깨달았다. 고양시비정규직노동자지원센터와 경기도아파트경비노동자지원사업단이 지난해 경기도 아파트 경비노동자 2,354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초단기 계약으로 인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참여한 경비노동자의 근로계약 기간은 1년(12개월)이 45.3%로 가장 많았고, 3개월, 6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을 한 노동자 비율도 절반에 가까운 46.4%를 차지했다. 당시 조사에서 경비노동자의 아파트 단지 평균 근속 기간이 3년이 조금 넘었던 걸 고려하면 초단기 계약을 반복 갱신해 고용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윤 씨가 일하는 용인 지역의 경우 3개월 이하 초단기 계약이 절반에 가까운 45.5%로 나타났고, 6개월짜리 계약도 9.7%에 이르는 등 6개월 이하 계약이 55.2%에 이르렀다. 심지어 한 달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 ‘초초단기’ 계약도 있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인 말인 ‘임계장’과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는 ‘고다자’는
경비노동자를 비롯해 계약직으로 불안하게 일하고 있는
노년 노동자들의 현실을 표현한 신조어다.


“10년 동안 경비노동자로 일하면서 자주 옮겨 다니지 않았어요. 최소 몇 년씩 일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고, 대신 일할 경비원이 필요하면 저에게 최우선으로 연락할 정도로 내 일처럼 챙겨서 일했어요. 계약직이었지만, 당연히 계속 하는 거로 생각하고 일했는데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닥친 거죠. 어디 옮길 새도 없이 갑자기 통보를 받았으니까요. 그전까진 단기 계약직이란 생각을 별로 안 했는데, 이번 일로 그런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 거죠. 또 일하던 경비원 전원이 해고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모두가 놀랐어요.”

경비노동자들은 흔히 ‘임계장’ 또는 ‘고다자’로 불린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인 말인 ‘임계장’과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는 의미의 ‘고다자’는 경비노동자를 비롯해 계약직으로 불안하게 일하고 있는 노년 노동자들의 현실을 표현한 신조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일하는 노인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60세 이상인 경제활동 인구는 495만 명에 이른다. 65세 이상도 264만 명이나 됐다. 15세 이상 경제활동 인구 2천653만 명 가운데 60세 이상이 19%(495만 명)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취업자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60세 이상이라는 것인데,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

아파트에 무단 투기된 쓰레기를 치우는 윤석주 씨와 동료 경비노동자들 ⓒ윤석주 씨 제공

하지만,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사회의 주축으로 일해왔고, 지금도 구성원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노년의 노동자들을 쉽게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처럼 생각한다. 노인 노동을 ‘소일거리’ 정도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런 현실에 한몫하고 있다.

경비노동자 등 노년 노동의 고단함을 기록한 책 ‘임계장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경비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겠다면서 마련한 간담회 자리에서 한 국회의원은 “여러분은 고령자가 일하는 모범 사례이십니다. 집에서 따분하게 노는 것보다 일을 하시니 건강에도 좋고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라고 말했다. 경비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저자는 이 말을 듣고 “기대에 부풀었던 가슴이 서늘해졌다. 의원은 경비원이 ‘집에서 노는 것이 따분해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탄했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걸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절대 소일거리가 아니에요.
아파트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필수노동자예요.”


국민을 위해 법을 만들어야 하는 국회의원조차 경비노동자의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소일거리처럼 일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인지 경비노동 등은 계속해서 일하지 않고, 쉬엄쉬엄 일한다고 해 ‘감시 단속적 업무’라 불리며, 2017년까진 최저임금도 다르게 적용돼 20% 감액이 가능했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걸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절대 소일거리가 아니에요. 아파트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필수노동자예요. 물론 가장 하찮게 취급 당하는 노동이기도 해요. 최저임금이 올라가면서 경비원을 줄이는 아파트가 많아요, 12명이 하던 일을 8명 또는 6명이 하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오른 임금을 경비원 줄이는 거로 메꾸는 거예요. 하지만, 일은 그대로예요. 그러다 보니 아파트 초소가 여러 개 있는데, 빈 초소가 생기고, 이를 메꾸려고 경비원들이 돌아가면서 근무를 하다 보니 하루에도 인수인계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요”

“또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경비원 휴게 시간도 늘렸어요. 제대로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닌데, 휴게 시간은 임금 계산에서 제외되니깐, 임금이 오른 부분을 휴게 시간으로 메꾸는 거죠. 큰 비가 오는 여름철이면 관리사무소에서 경비원들에게 휴게시간에 경비실에서 쉬라고 해요. 비가 와 지하의 물이 일정 수위가 되면 기계가 작동해 물을 빼주는데, 고장이 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비상벨이 울려요. 급하게 대응을 해야 하는데, 그 비상램프가 대부분 경비실에 있어요. 언제 벨이 울릴지 모르는데, 제대로 쉴 수가 있을까요? 대응이 늦거나 잠들어서 비상벨을 못 들으면 지하주차창이 물바다가 되고, 차들도 다 침수가 되거든요. 이런데도 소일거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뿐만이 아니다. 경비노동자는 자신의 업무 범위를 넘어 각종 아파트 잡무에 동원된다. 이런 현실 때문에 지난해 경비원의 업무 범위를 경비업법 시행령에 명시했다. 경비원은 경비 업무 외에 공동주택 관리 업무로서 △청소와 이에 준하는 미화의 보조 △재활용 가능 자원의 분리배출 감시 및 정리 △안내문의 게시와 우편 수취함 투입 등을 할 수 있다. 반면에 도색·제초작업, 수목 식재, 소독 및 정원조성, 건물 내 청소, 개별세대 대형폐기물 수거·운반, 공용부분 수리, 각종 동의서 징수와 전기·가스 검침, 개인차량 주차대행(대리주차), 개별세대 택배물 배달 등은 제한된다. 윤 씨는 제도 시행 3개월 정도 지난 현재 명목상으론 업무가 명확해졌지만, 여전히 현실에선 잡무를 거부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노동자의 자존심도 제대로 대접받을 때 나온다.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고다자’ 경비노동자들은 관리사무소의 요구에
늘 숨죽이며 따를 수밖에 없다.


“동료들에게도 공지가 됐어요. 그런데 경비반장이 매번 관리사무소 아침 회의에 참여해요. 그 자리에서 예초 작업 등 주간 작업 일정을 알리고, 협조하라고 당부합니다. 보통 외부 업체에 용역으로 일을 시키는데, ‘협조’하라는 게 어느 범위까지 인지 경비반장으로선 고민이 클 수밖에 없어요. 용역으로 진행하다 보니 최저 입찰로 업체를 결정하고, 그런 때문인지 일하는 사람이 적게 오고, 뒷마무리도 잘 안 돼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경비일지에 기록은 하지 않은 채 ‘협조’를 명목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또 정리가 제대로 안 되면, 민원이 나오고 그런 압력이 고스란히 경비노동자에게 돌아가거든요.”

아파트 지하에 있는 경비노동자의 휴식 공간. 그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알 수 있다. ⓒ윤석주 씨 제공

법적인 장치가 마련되도, 경비노동자의 고단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1개월부터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을 한 경비노동자가 부당함에 맞서고, 법을 어기는 관리자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긴 힘들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2020년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흔히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차별을 용인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사기다. 실제 대우를 정당하게 해줘야 귀천이 없어지는 거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당한 대우 받을 수 있게 되고,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게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자존심도 제대로 대접 받을 때 나온다.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고다자’ 경비노동자는 관리사무소의 요구에 늘 숨죽이며 따를 수밖에 없다. ‘임계장 이야기’의 저자는 아파트 차량 차단기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관리사무소장에게 100일 넘게 괴롭힘을 당한 이야기를 하며 당시 경력 10년이 넘는 선배 경비노동자가 해준 말을 책에 이렇게 적었다.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 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 책 ‘임계장 이야기’ 중에서


“자네는 경비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폐기물 더미에서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초소에서 잘 수 있겠어? 사람이라면 어떻게 석면 가루가 날리는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 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경비노동자를 향한 입주자들의 ‘갑질’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도 경비노동자의 이런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경비노동자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관리사무소에 찾아가 자르라고 주민이 요구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경비노동자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사라진다. ‘갑질’을 해도,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다. 윤 씨도 주민의 ‘갑질’ 때문에 호되게 고생한 적이 있다.

“제가 지금 일하는 아파트가 860세대에요. 다들 괜찮은데 경비노동자를 괴롭히는 분들은 10세대 미만으로 극히 일부에요. 예전에 한 젊은 주민이 경비원들을 계속 괴롭혔어요. 윗층하고 층간소음으로 분쟁이 나서 협박하다시피 해서 돈도 많이 받아냈던 분이에요. 아파트 지상에 주차하지 말라고 해도 지하에 주차를 하라고 해도 꼭 지상에 주차를 하고,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주차하면 꼭 신고를 해요. 그런데 그 분이 또 관리사무소에서 시비가 붙었어요. 제가 마침 비번이었는데, 그날 잠깐 사무실을 들렀다가 이야기를 했어요. 욕설을 하기도 해서, 녹음을 했어요. 57분 정도 되더라구요. 논리적으로 설득도 하고, 술 한잔 하자고 달래기도 하고 해서 결국은 해결을 했어요.”

경비노동자의 싸움이 시작되다
“매일 오전 관리사무소 앞에서
우리의 요구사항을 반복적으로 외쳤어요.
우리의 억울한 사연을 담은 전단지를 만들어
아파트 주민들에게 돌렸어요.
매일 촛불집회도 열었구요.”


‘갑질’과 ‘부당함’을 이겨내며,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일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다른 직장으로 옮길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갑자기 날아온 해고 통보였다. 설을 10여 일 앞두고 벌어진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힘을 모아 부당한 현실에 맞서기로 했다. 계약이 종료된 2월 1일부터 그들은 경비 일이 아닌 부당 해고에 항의하는 집회를 시작했다.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렀지만, 절박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아파트 경비노동자 9명이 해고된 것에 항의하는 촛불집회를 매일 열었고, 많은 주민이 자녀들과 함께 했다. ⓒ용인비징규직상담센터 김영범 소장 제공

“해고통보를 받고 곧바로 ‘생존권 사수’ 등 구호를 적은 현수막을 아파트 단지에 걸고, 또 어깨띠도 하고, 피켓도 들었어요. 함께 해고된 경비노동자 가운데 색소폰 연주를 하는 형님이 앰프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사용해 집회도 열었어요. 미니확성기, 앰프, 큰 북 등을 동원해 매일 오전 관리사무소 앞에서 우리의 요구사항을 반복해서 외쳤어요. 우리의 억울한 사연을 담은 전단지를 만들어 아파트 주민들에게 돌렸어요. 매일 촛불집회도 열었구요.”

주민들의 응원과 여러 단체의 연대가 힘이 되다
“우리 경비원을 돌려주세요”


처음엔 막막했고,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무모해 보였던 ‘어르신’ 노동자들의 싸움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아침저녁으로 경비노동자와 함께 생활한 주민들이 힘을 보탰다. 함께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아파트 단지 곳곳엔 ‘우리 경비원을 돌려주세요’라는 주민들의 응원 현수막이 걸렸다. 주민들이 직접 나서 각종 물품을 지원했고, 투쟁에 보태라며 십시일반 성금도 모았다. 윤 씨가 짬이 날 때마다 선반도 달아주고, 배수로도 고쳐줬던 아파트 상가 식당 주인은 경비노동자에게 누룽지를 끓여주며 지원에 나섰다. 이 모습을 본 어떤 주민은 “아저씨들 투쟁이 끝날 때까지 식비를 지원하겠다”면서 동참했다. 주민 뿐만 아니라 지역 진보정당과 여러 단체도 연대했다. 이런 주민의 성원과 주변의 관심이 이들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당시 열린 촛불집회에서 윤 씨는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전했다.

“참으로 감사하고 눈물 납니다. 출근길에 차창을 여시고 엄지손가락을 세워주시며 격려 응원하여 주시는 많은 주민이 계시기에 해직이 되었어도 긍지를 느낍니다.”

아파트에 주민들이 건 현수막. 주민들은 성금을 모으고, 식사를 제공하는 등 경비노동자의 투쟁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용인비정규직상담센터 김영범 소장 제공

2월 18일엔 기자회견도 열었다. 경비노동자들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경비원들이 갑질 당하고 얻어맞고 보호 받지 못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경비원 임시계약직의 설움은 차가운 한파보다 더 무섭게 느껴진다”면서 “우리 경비원들은 원직 복직되는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 피눈물 나는 임시계약직 경비원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보도바란다”고 절절하게 호소했다. 당시 이들의 투쟁은 용인 지역 신문은 물론 여러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면서 관심을 모았다. 이들이 일하고 있던 아파트 단지와 용인시 차원을 넘어 전국적인 이슈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기자회견 6일 뒤인 2월 24일 백군기 용인시장이 이들의 투쟁 현장을 방문해 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함께 모여서 싸우면서 혼자는 힘이 없지만,
함께 할 때 힘이 생기고, 권리도 지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노동3권’이잖아요. 함께 모여서 싸우면서 혼자는 힘이 없지만, 함께 할 때 힘이 생기고, 권리도 지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힘을 모으고, 주민들과 여러 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4월 9일까지 70여 일 동안 싸웠어요. 주민들이 서명을 받아 아파트 관리사무소 운영과 관련한 감사를 경기도에 신청해 감사도 진행됐어요. 결국, 관리소장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고, 관리소장과 함께하던 사람들도 그만뒀어요. 입주자대표회의 대표자들이 사퇴해 입주자대표회의를 다시 구성했어요. 그리고, 경비원에 결원이 생기는 대로 해고된 이들을 우선 복직시키기로 합의했고, 나이가 가장 많은 한 분만 우선 근무를 시작하기로 했어요.”

경비노동자들은 아내가 아파서 병원비 등 사정이 급했던 동료가 10년 넘게 일한 아파트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자신들도 복직을 약속 받긴 했지만, 어차피 마냥 기다리고 쉴 수 없어 다른 아파트 단지에 다시 취업했기 때문이다. 윤 씨는 “우리가 복직되는 것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고, 잘못된 현실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경비노동자들의 투쟁은 전국적인 이슈가 됐고, 백군기 용인시장도 투쟁현장을 방문해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윤석주 경비노동자, 세번째가 백군기 용인시장이다. ⓒ용인시청 제공

경비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킬 조직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부당해고 투쟁 초기부터 이들을 지원한 용인비정규직상담센터 김영범 소장의 도움으로 용인아파트경비노동자협회가 창립됐다. 8월 27일 용인비정규직상담센터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윤 씨는 회장으로 선출됐다. 4일 뒤인 31일엔 경기도 15개 지역 1천여 명의 경비노동자가 참여해 경기도아파트경비노동자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용인아파트경비노동자협의회 건설로 바꾼 현실
경비노동자 인권조례 제정
‘고용보장 상생아파트 협약’ 체결


용인시의회에선 경비노동자를  위한 조례도 제정됐다. 지난해 9월 2일 열린 제257회 용인시의회 임시회에서 조례가 가결된 것이다. 조례는 경비원 등 공동주택 노동자의 인권과 근로 환경을 지키기 위해 실태조사, 기본시설 설치 보조금 지원 및 피해구제 상담 지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얼마 전엔 용인시노사민정협의회 위원으로 위촉됐다. 또 지난 1월 6일엔 용인시 경비노동자 초단기계약 근절을 위한 ‘고용보장 상생아파트 협약식’도 열렸다. 자봉마을 써니밸리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와 용인비정규직상담센터, 용인경비노동자협회가 맺은 이번 협약엔 3개월 등 초단기 계약은 지양하고 아파트 경비/청소 노동자들이 고용불안 없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적절한 휴게시간을 보장하고 쾌적한 휴게공간 조성을 위해 노력하며, 협약 당사자는 건강한 아파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지원하고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앞으로 협약을 맺는 아파트 단지를 계속 늘릴 계획이다.

용인아파트경비노동자협의회 창립총회 장면. 이날 윤석주 씨는 회장으로 선출됐다. ⓒ용인비정규직상담센터 김영범 소장 제공

이런 변화를 통해 경비노동자의 일터가 얼마나 바뀔지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나서 싸우고, 그렇게 만든 조직으로 얻어낸 성과기에 모든 게 소중했다. 이렇게 조직을 만들고, 싸워나갈 수 있었던 건 주변에 늘 사람을 모으고 함께하는 그의 성품을 모두가 믿었기에 가능했다. 용인비정규직센터 김영범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윤석주 회장님은 대서소를 해도 될 만큼 글을 참 잘 쓰세요. 카톡방에서 회원들에게 공지할 때나 요청할 때 글을 참 보는 사람에게 예의가 느껴지게 잘 쓰시는 분입니다. 자주 시를 쓰시는데, 아마도 그런 시 창작 감수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의 바르게 하기 때문에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나이가 적든 많이 모이는 것 같아요.”

우여곡절 많은 삶의 시간을 지나
인생의 마지막 직장인 ‘경비’를 시작하기까지


지난해 설을 앞두고 처음 해직을 경험했을 땐 설움도 컸지만, 올 2월이면 경비노동자로 만 10년이 되는 윤 씨는 지난 시간이 부끄럽진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50대 중반이던 2012년 2월 부터 경비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경비노동은 흔히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라 불린다. 여러 일을 하며 청춘과 중년을 보낸 노년의 노동자들이 정년퇴직 후 마지막으로 오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60대 중후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많다. 다양한 직장에서 다양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그렇기에 사연도 많고, 이야기도 많다. 경비노동자로선 조금 이른 나이인 50대 중반에 일을 시작한 윤 씨도 시쳇말로 ‘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 망하기도 여러 번 망했고, 삶과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고, 먹고 살기 위해 이사도 여러 번 다녀 ‘주민등록원초본’을 떼면 서류가 3장이나 된다.

지난 1월 24일 인터뷰를 마친 윤석주 씨. 이날 인터뷰는 3시간 넘게 진행됐다. ⓒ민중의소리

“1955년 전라북도 김제군 변두리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중고등학교는 전주에서 다녔구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집에 2년 동안 있으면서 농민의 꿈을 키웠어요. 농사지으면서 누에도 길렀고, 4H운동에 참여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했어요. 하지만,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고, 결국 취직을 했어요. 당시 대한교과서 공장이 경기도 성남에 있었는데, 그곳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매형이 제가 있던 지역 국회의원 사무실을 통해서 소개해준 회사였어요.”

제약회사에서 10년을 일했지만,
회사가 부도나면서 아파트 한 채 값인
퇴직금을 날리다


하지만, 그의 첫 직장 생활은 1년 여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인쇄과’에서 일했는데, 야간근무가 많았고, 잉크가 하루종일 날리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더구나 함께 일하는 선배들이 잡심부름을 시키고, 못했다고 핀잔과 함께 세게 ‘꿀밤’을 때렸다.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 모집공고를 보고 제약회사에 들어갔다. 생산 파트에서 10년을 일했다. 그가 다녔던 제약회사는 일종의 가족회사였다고 한다. 가족들끼리 운영하다 보니 외부 직원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일했고, 과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근무 만 10년을 불과 2개월 남기고 회사는 부도가 났다.

“그게 제 인생의 첫 번째 쓰라린 경험이었어요. 10년 가까이 일한 퇴직금만해도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이었어요. 돈을 못 받아도 어디 하소연할만한 데도 없었던 시절이었구요.”

삼십 대 초반에 다시 직장을 구해야 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플라스틱 사출 공장, 우유 보급소, 유통물류 배달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그러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그가 다니던 공장은 노동자들이 3교대로 일하며 기계를 24시간 풀가동하던 직장이었고, 그는 총무과장 겸 생산1부 과장을 맡아 일했다. 당시 공장 사람들 모두 열심히 일했지만, 적자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사장님하고 친분도 있고 해서 이런저런 제안도 하면서 회사를 살리려고 애를 썼어요.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에 외국인들이 많다든데 이들을 일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어요.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데려와 숙소를 주고, 내국인 노동자들이 일대일로 교육하게 해서 현장에 배치했어요. 저는 야간 근무를 자청해서 연속해서 일했어요. 그렇게 10개월 정도 지나니 회사가 흑자로 전환됐어요. 성남에서 성수동까지 시내버스로 출퇴근하며 야간 근무를 하느라 힘겨웠지만, 보람이 컸어요.”

하지만, 이런 보람도 오래가진 못했다. 얼마 안 돼 회사 사장 사돈이 정년퇴직 퇴직 후 이사로 회사에 왔고, 잔소리와 간섭이 많았다.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의 불만도 커졌다. 퇴직금을 중간정산 받고, 전세금에 보태고 차를 샀다. 그 차를 타고 한동안 출퇴근을 한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입사 5년 7개월 만이었다.

구두가게로 돈 좀 벌었지만,
IMF에 사업이 망하고, 빚더미에 앉다
“‘반지하라도 좋으니 가족이 함께 흩어지지 않고
살 수 있게 하시고,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사직하고 한 50일 정도 지났는데, 회사 공장에 큰불이 나서 한순간에 다 잿더미가 되어 버렸어요. 공장도 문들 닫게 되었죠. 그런데, 중간 정산 이후 밀려 있던 월급이랑, 남은 퇴직금은 못 받았어요. 퇴직금도 아깝긴 했지만, 무엇보다 제가 일했던 공장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소식에 걱정도 됐고, 안타까운 마음이 컸어요.”

염천교 수제화 거리 모습. 윤 씨는 1990년 대 이곳에서 구두 가게를 운영했다. ⓒ민중의소리

이후 짧게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무슨 일을 할지 고민만 커졌다. 그러다 서울 염천교에서 구두공장을 하는 친한 고향 후배와 일하면서 공장 운영을 도왔고, 구두 관련 일도 배웠다. 이후에 구두 사업을 해보라는 친구의 제안을 받고 돈을 끌어모아 구두 가게를 차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구두공장에 디자인을 넣고, 신발이 만들어지면 그걸 가게에서 손질해 팔았어요. 일반 단화 구두가 2만 원에서 2만 4천 원 정도에 했어요. 마진이 2~4천 원 정도 됐거든요. 여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신을 함께 파니깐, 장사가 잘됐어요. 가게를 직접 찾는 손님에게 팔기도 했고, 지방에서 우리 가게에 주문을 넣기도 했어요. 샘플을 보고 팩스로 주문을 하면, 공장에서 생산하고, 다시 상표를 부착해서 각 지방에 철도로 보냈어요. 이렇게 3~4년 정도 운영하고 나니 모두 현금은 아니었지만, 수금할 돈 등 해서 4억 원 정도가 모였어요.”

하지만, 호황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에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IMF 사태가 터져버린 것이다. 소비자들에겐 현금 거래를 했지만, 지방은 외상거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금이 제대로 되지 않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직접 전국을 돌며 상황을 살폈지만, 도저히 돈을 받을 재간이 없었다. 수금은커녕 오히려 술 한 잔 사주며 지방 가게 사장들을 위로하는 일이 많았다. 당좌수표를 발행해서 썼었는데,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당좌수표가 문제가 돼 ‘부정 수표단속법’에 걸렸다. 결국, 재판 끝에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 6개월, 벌금 4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실형은 피했지만, 아이들은 커가면서 학비는 많이 들어가는 데 사업은 망했고, 빚도 생겼다. 모든 게 막막한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도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힘든 와중에 기도를 많이 했어요. ‘반지하라도 좋으니 가족이 함께 흩어지지 않고 살 수 있게 하시고,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매제를 찾아가 ‘노동일이라도 하겠다’고 말했어요, 곧바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못 박는 아주 기초적인 일부터 시작했어요.”

지방을 돌며 건설 현장에서 9년을 일하고,
아내와 큰아들에게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


그는 미친 듯이 일했다. 건설 현장 일은 유동적이어서 일정한 돈을 벌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남들이 200만 원 벌 때 그는 쉬는 날 없이 더 일해서 280만 원을 만들었다. 그가 그렇게 일하는 동안 두 아들은 번갈아 휴학하면서 대학을 다니며 경제적 부담을 줄였다. 그렇게 9년 정도 일하고 나니 신용이 회복되는 등 구두 사업으로 입었던 손해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다.

아파트 건설현장. 윤 씨는 구두 가게가 망한 뒤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해 9년을 일했다. ⓒ민중의소리

“근데 몸은 말이 아니었어요. 공사 때문에 지방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은데, 아무래도 일 끝나면 동료들하고, 어울릴 일이 많거든요. 술도 자주 먹고, 담배도 자주 피우게 되죠. 제가 지방에서 일하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이 얼굴은 시커멓고, 이만 하얗다고 하더라구요. 어느 날 지방에 있는데, 아내와 큰아들이 저를 데리러 왔어요. 집으로 다시 오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집에 끌려오다시피 다시 돌아왔어요.”

집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택배를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9인승 RV차량을 이용해 택배 배달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200개에서 300개를 배달했다. 하지만, 배달 단가는 720원에 불과했다.하루 300개를 배달해도, 21만 6천 원을 버는 게 고작이었다. 기름값, 보험비, 식대에 자동차 감가상각비까지 고려하니 노동시간은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하거나 긴데 버는 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택배를 하다 만난 경비노동자의 길
그리고, 10년이 지나다
“지금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해요. 부러울 것이 없어요.”


“몸만 축나겠더라구요. 고민이 컸는데, 마침 제가 택배 하면서 찾은 아파트에 경비로 일하시는 어르신이 저를 관심 있게 보시곤, 경비 일을 해보겠냐고 제안을 하시더라구요. 어르신이 월급은 조금 적어도 장점이 많다고 하셨어요. 택배처럼 몸 상할 일도 많지 않고, 격일로 근무하니깐, 쉬는 날 ‘대근’(대체근무)을 나가면 돈도 더 벌 수 있다면서 추천하셨어요. 저는 ‘아직 경비 일 하긴 어리다’고 했는데, ‘그러지 말고 이력서 두어 통 주면 내가 소개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이력서를 드렸고, 곧 연락이 왔어요. 택배는 한 달 만에 그만뒀고, 경비노동자가 됐습니다.”

한 달 지나 첫 달 급여가 들어왔다. 145만 원이었다. 세금과 4대보험을 공제하고 나니 133만 원 정도가 됐다. 건설 일을 할 때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가족과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술 마실 일도 많지 않아 돈 쓸 일도 별로 없었다.

윤 씨는 지난해 용인아파트경비노동자협회 회원들과 함께 여행을 갔다. 그는 협회를 더욱 강화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윤석주 씨 제공

“6개월 정도 일하니깐 건설일 할 때 건설공제조합에 적립했던 퇴직공제금이 몇백만 원 들어왔어요. 일하다 보니 근로장려금도 나왔구요. 4대보험이 되니깐 의료혜택도 나오고, 해마다 조금씩 임금도 올랐구요. 1년 넘게 근무하면 퇴직금도 받을 수 있구요. 무엇보다 술을 안 먹으니 건설할 때 상했던 몸이 좋아졌고, 집사람이랑 쉬는 날 산에도 가고, 고향에도 내려가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아들들이 결혼하고, 손주들을 낳으면서 같이 놀 시간도 생겼구요. 쉬는 날 ‘대근’으로 추가 수입도 올리면서 월 220만 원에서 240만 원 정도 벌게 됐어요. 원래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엔 아내도 산후 도우미, 가사 도우미 등으로 일했는데, 지금은 그만 뒀어요. 임대아파트를 얻어서 살고 있는데, 나가는 돈이 적다 보니 경비생활 10년이 지나 지금은 빚이 없고, 사는데 큰 걱정이 없어요. 경비하면서 나온 퇴직금은 매번 며느리들 옷을 사줬어요.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요. 아이들 결혼할 땐 사정이 어려워서 제대로 해준 게 없었거든요. 지금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해요. 부러울 것이 없어요.”

“지금 협회 회원이 100여명인데,
올해는 200명까지 늘리려고 합니다.
여러 활동을 통해 조직을 키우며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할 생각입니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말했다. 그가 지나온 시간들도 삶의 우여곡절은 힘들고 비극적이었지만, 인생은 행복하고 아름다웠다. 파도가 사람 키의 만 배나 됐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시간이 지났다. 시를 쓰길 즐기는 윤 씨는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자신이 쓴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둡고 무서운 밤을 이겨내고
살 에이는 겨울 삭풍을 견디며
피 살물 쏟게 했던 찌는 더위와
태풍 홍수까지도 견뎌 낸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러나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랑초다”


한 해에 두 번이나 해고를 당하는 등 여전히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는 사랑초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냈다. 동료들과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고 싸우며 보람을 얻었다. 그리고, 앞으로 조직을 더욱 키우며 경비노동자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투쟁 과정에서 시장과 시의원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힘이 미약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는 우선 힘부터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협회 회원이 100여 명인데, 올해는 200명까지 늘리려고 합니다. 용인시에 아파트 단지가 540개 있고, 거기서 일하는 경비노동자가 2천500명은 넘거든요. 이들에게 조직을 알려야지요. 회원들이 모여 지역 주민들을 위한 봉사 활동도 할 계획이에요. 이렇게 활동하는 게 지역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 함께 할 수 있는 경비노동자가 많아질 수 있을 겁니다. 경비노동자를 위해 구직 소개도 할 계획이에요. 경비노동자가 이직할 때 직장을 구하려고 직업소개소를 거치면 임금의 10%를 소개비로 떼거든요. 소득이 적은 경비노동자 입장에선 그것도 부담이 커요. 이렇게 여러 활동을 통해 조직을 키우며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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