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제국주의와 신 제국주의의 코미디 같은 대리전 _ 바나나 전쟁

[연재] 설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 ③

*편집자 주 - 지난 추석에 이어 설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무역 적자를 만회하는 제국주의의 가장 비열한 방법 _ 아편 전쟁
② 풍요와 빈곤이 동시에 시작되다 _ 산업혁명
③ 구 제국주의와 신 제국주의의 코미디 같은 대리전 _ 바나나 전쟁
④ 이스라엘의 탐욕이 초래한 나비효과 _ 석유파동
⑤ 미국, 소련 경제의 아킬레스건을 노리다 _ 소련 경제 붕괴 작전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업이라는 것이 있다. 백인들이 노예를 사고파는 처참한 짓을 벌인 원인이 됐던 농업 방식이다. 플랜테이션 농업의 사전적 정의는 ‘환금 작물(cash crop), 즉 돈이 되는 농작물을 전문으로 재배하는 대규모 상업적 농업’이다.

환금 작물이란 우리가 보통 주식으로 이용하는 곡물이 아니라 커피나 설탕, 담배나 차, 목화나 고무처럼 팔기 위해 재배를 하는 것들이다. 이런 환금 작물들은 대부분 열대나 아열대 기후에서 잘 자란다. 이 때문에 플랜테이션은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주로 이뤄진다.

그런데 교과서나 사전 등에서는 이 플랜테이션을 “서구의 기술력과 자본 및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해 이뤄지는 농업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이 둘이 잘 조화를 이뤄 환금 작물이 재배되는 것처럼 서술한 셈이다.

하지만 플랜테이션은 이 서술처럼 아름다운 콜라보레이션이 절대 아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에 따르면 2021년 지구에는 무려 1억 5,500만 명이 식량 위기를 겪고 있다. 1분마다 11명, 즉 5.5초마다 한 명이 굶어서 죽는다. 이 기사를 읽는 독자 여러분,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큰 숨을 쉬어보시라. 숨을 들이마셨다가 편하게 후 하고 내뱉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지구 위에서는 누군가가 굶어서 죽었다.

문제는 기아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이 만연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곳의 넓은 땅에 돈이 되는 환금 작물부터 재배하는 것이 옳은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곡물부터 재배하는 것이 옳은가?

“거기서 플랜테이션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커피와 설탕, 담배를 얻는단 말이냐?”라는 반론은 너무 잔인하다. 커피, 설탕, 담배는 기호식품이다. 그리고 기호식품(嗜好食品)은 말 그대로 맛과 향기를 즐기기 위한 음식들이다. 속된 말로 그거 없어도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주식(主食)으로 이용되는 곡물이 없으면 진짜로 사람이 죽는다. 우리의 맛과 향기를 위해 누군가가 5초에 한 명씩 죽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플랜테이션이 민중을 죽이고 있다


플랜테이션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농업 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원래 이 지역 농민들이 주로 재배하던 것은 당연히 주식으로 사용할 곡물이었다. 담배나 설탕 같은 기호식품은 말 그대로 기호를 충족할 만큼만 재배했다.

하지만 서구 자본이 이 지역을 휩쓸면서 곡물을 재배해야 할 농경지는 삽시간에 기호식품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지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세네갈의 경우, 과거에는 수수와 조를 주로 재배했으나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땅콩을 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지금 세네갈은 이 땅콩을 수출해 번 돈으로 동남아에서 쌀을 수입하는 황당한 지경에 처해 있다. 그렇게 땅콩을 판 돈으로 쌀을 수입해 굶어 죽지 않으면 된 것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2018년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UN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네갈은 부르키나파소, 차드, 말리, 모리타니, 니제르, 나이지리아와 함께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 국가로 분류되며,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기근이 늘어나는 곳 중 하나다.

더 잔인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기아가 극심한 여러 대륙의 농지에서는 옥수수가 재배된다. 이 옥수수는 담배나 설탕 같은 기호식품과는 달라서 사람이 먹으면 얼마든지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곳 원주민들은 이 옥수수를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옥수수의 대부분을 사람이 아니라 소가 먹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4분의 1을 사람이 아니라 소가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5.5초마다 한 명씩 굶어 죽는 판에 도대체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까?

이유는 옥수수를 소에게 먹인 뒤 그 소고기로 햄버거를 만들어 팔면 돈을 벌 수 있지만, 옥수수를 굶주리는 민중들에게 팔면 돈을 별로 못 벌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 회사들이 기아에 시달리는 빈민들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옥수수를 사 줄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2007년부터 시작된 바이오 연료 열풍도 이 사태를 부채질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옥수수에서 나오는 전분을 이용하면 에탄올이라는 물질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에탄올을 가공해 연료로 만들면 석유나 석탄에 비해 훨씬 친환경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때부터 수많은 대기업들이 바이오 연료를 개발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옥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금융자본이 여기에 뛰어들면서(돈이 될 것 같으니까!) 아프리카의 농토는 사람이 먹을 곡물이 아니라 자동차에 넣을 연료를 생산하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스위스의 사회학자이자 UN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장 지글러(Jean Ziegler)는 이런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스위스 로잔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 아닥스 바이오에너지(Adax-Bioenergy)는 최근 세계 최빈국인 시에라리온에서 2만 헥타르의 땅을 매입했다. 이 회사는 그 땅에 바이오에탄올 제조에 쓰이는 사탕수수를 심을 예정이다.

이 같은 약탈에 필요한 대금을 지원하는 세계은행이나 유럽투자은행, 아프리카개발은행의 논리는 한마디로 사악하기 그지없다. 아프리카 농부들의 생산성이 너무도 낮으므로 그 땅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생산자들’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로잔에 근거지를 둔 약탈자들이 차지한 땅은 아프리카 농부들, 특히 벼농사를 짓는 수천 가구의 삶의 터전이었다. 아닥스는 한껏 너그러움을 과시한다. 제한적인 수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이들 농부들의 자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약속한 급여는 일당 1만 레온, 다시 말해서 1.8유로에 불과하다.”

미국, 바나나를 매개로 남미를 들쑤시다


우리가 즐겨 먹는 바나나도 플랜테이션 작물에 속한다.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는 국가가 없지는 않지만, 지구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바나나는 서구 자본의 주도 아래 재배돼 기호식품으로 수출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바나나는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비극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어낸 과일이기도 하다.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는 “열대 국가에는 바나나가 그렇게 주렁주렁 열려있는데 왜 사람들이 굶어죽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열대국가에 주렁주렁 매달린 바나나는 대부분 그 나라 민중들의 것이 아니다. 전 세계 바나나의 대부분은 치키타(Chiquita), 돌(Dole), 델몬트(Del Monte), 스미후루(Sumifru) 등 4대 메이저 회사의 소유다.

이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열대국가의 농경지를 대량으로 사들여 바나나를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일본 회사였다가 최근 주식 매각을 통해 싱가포르를 본거지로 삼게 된 스미후르를 제외한 나머지 세 회사는 모두 미국을 기반으로 한 다국적기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나나를 옥수수와 함께 가장 슬픈 운명(!)을 지닌 농작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유는 이렇다. 바나나가 세계적(?)인 과일이 된 때는 20세기 초반이었다. 미국은 19세기 중후반 벌어진 미국-멕시코 전쟁과 미국-스페인 전쟁의 연이은 승리로 중남미 지역에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시절 미국 사업가 마이너 키스(Minor Cooper Keith, 1848~1929)라는 자가 코스타리카에서 바나나 독점 수출권을 획득한 뒤 이 나라의 비옥한 영토를 모조리 바나나 농장으로 바꿔버렸다. 키스가 설립한 회사 이름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 United Fruit Company)였는데 이 회사가 바로 바나나 4대 메이저 중 하나인 치키타의 모태다. UFC는 코스타리카에 이어 과테말라의 땅도 싹쓸이해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만들었다.

알다시피 바나나는 무르기 쉬운 과일이다. 따라서 과일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운송을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UFC는 “바나나를 잘 운송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의 철도 부설권까지 획득했다.

땅도 땅이지만 철도 부설권은 그 나라의 젖줄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 제일 먼저 철도 부설권부터 챙긴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어떤 경우도 철도 부설권은 외국 기업에 함부로 넘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 정부는 이 중요한 권리를 UFC에 덜컥 넘겼다.

1932년 미군 해병대가 니콰라과에 진출해 기념 사진을 찍는 모습 ⓒ기타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UFC는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이들 나라의 독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둘째,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인데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중남미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국은 UFC 같은 자국 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남미 독재자들과 손을 잡고 남미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간혹 이들 나라에서 국민들의 열망으로 민주정부가 수립되기라도 하면 미국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나라의 내정에 개입해 민주정부를 무너뜨렸다. 당시 남미의 민주정부들은 미국 기업들이 점유한 광활한 토지를 되찾기 위해 토지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때마다 미국은 전가의 보도인 “저들은 빨갱이다!”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부추겨 민주정부를 붕괴시켰다.

1차 세계대전 무렵 미국은 자국의 바나나 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쿠바, 푸에르토리코, 온두라스, 니카라과, 아이티 등에 거침없이 군사를 파견했다. UFC뿐 아니라 하와이를 기반으로 출범했던 과일업체 돌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중남미 지역을 장악했다.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의 승리로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차지했는데, 필리핀에서도 이 짓을 반복했다. 필리핀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업을 주도한 회사는 델몬트였다.

미국의 비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중남미 지역 바나나 분쟁은 1934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남미 지역에 군사개입을 중단하고 선린 외교를 펼치겠다.”고 발표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바나나에 관한 분쟁은 멈췄으나 중남미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차지하려는 미국의 야욕은 멈추지 않았다. 이후 미국은 각종 명분으로 끊임없이 중남미 정치에 개입해 민주정부를 붕괴시켰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를 지원했다.

북아프리카 국경선이 직선인 까닭


20세기 최고의 패권국가이자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의 중남미 침탈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미국 이전에 세계를 제패했던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을 필두로 한 유럽 국가들이 안 들쑤시고 다닌 지역이 없지만, 이들의 악랄함이 극명하게 드러난 대륙은 단연 아프리카였다.

사람을 노예로 사고파는 노예무역을 비롯해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벌인 참상을 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인데 그 중 시각적(!)으로 가장 황당한 것이 북아프리카 지역의 국경선이다. 아프리카 지도를 한 번 보라. 북부 아프리카 지역의 국경선이 모두 직선으로 돼 있다. 원래 국경이란 산이나 강 같은 자연 지형에 의해 결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의 국경은 그냥 직선이다.

도대체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 1880년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쟁탈전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1881년 튀니지, 1884년 기니를 합병했다. 프랑스의 영원한 라이벌 영국도 1882년 이집트, 1884년 수단과 에리트레아, 소말리아를 각각 자기 땅으로 삼았다. 독일도 1884년에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를 각각 자국의 식민지라고 선언했다.

유럽 국가들이 너도나도 아프리카 땅을 탐내니 분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쟁이 가열되자 유럽 각 나라들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응?)한다는 명목으로 독일 베를린에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놓고 자를 갖다 댄 뒤 펜으로 죽죽 선을 그으며 각자의 땅을 지정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베를린 컨퍼런스다.

즉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이 일직선인 이유는 베를린에 모인 유럽인들이 지들 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버렸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얼마나 오만방자했는지를 드러내는 극단적 사건이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당수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독립을 쟁취했다. 유럽인들의 횡포가 워낙 오랫동안 지속됐던 탓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을 법도 한데 사정이 또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에 인접해 있었고, 유럽의 지원이 없다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동서 냉전이 격화된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제3세계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유럽 열강들은 과거 식민지 지배라는 인연(?)이 있었던 이들에게 적당한 지원을 제공하며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역사상 가장 길었던 무역 분쟁


이런 역사적 배경 탓에 미국은 전통적으로 친(親)중남미 성향을, 유럽은 친(親)아프리카 성향을 보였다. 미국이 오랫동안 중남미를 주물럭거렸고, 유럽이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를 수탈한 인연(!)의 결과다.

그런데 이런 상반된 성향을 가진 미국과 유럽이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에 걸쳐 바나나를 사이에 두고 일대 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1993년 11월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이 공식적으로 출발하면서 시작됐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과거 아프리카 수탈의 경험이 있는 유럽 12개국이 경제 시스템을 큰 틀에서 통합한 것이다. 통합된 경제에 따라 중요한 무역정책도 EU가 일괄적으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EU는 통합된 무역 정책으로 이른바 ACP 국가들, 즉 아프리카(Africa)와 카리브해(Caribbean), 그리고 태평양(Pacific) 연안국들로부터 수입되는 바나나에 무역 특혜를 주겠다고 밝혔다. ACP가 어떤 곳인가? 아프리카와 태평양 연안은 유럽이 오랫동안 식민지로 지배했던 지역이다. 또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중남미에 위치해 있지만 남미 대륙의 국가들과 달리 미국의 영향력이 적은 곳이었다. 즉 이곳은 유럽이 원조 몇 푼 던져주며 국제적으로 자기편으로 관리해오던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바나나 특혜는 유럽이 이들에게 던져준 또 하나의 떡고물이었다. EU는 ACP 국가들로부터 수입되는 바나나 상당량을 무관세로 수입하기로 한 반면 그 외의 나라에서 수입하는 바나나에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EU가 대놓고 “우리는 ACP에서 생산되는 바나나만 사 먹을 거예요.”라고 선언한 셈이다.

문제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중남미 국가들 또한 바나나 수출이 매우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었다는 데 있었다. EU의 이 같은 정책으로 유럽에 바나나 수출길이 막힌 중남미 국가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이전까지 유럽이 소비하는 바나나의 75%는 중남미 국가들로부터 수입된 것이었다.

중남미 독재자들을 지원하며 이들을 자기편으로 관리하던 미국이 EU의 조치에 발끈하고 나섰다. 게다가 중남미에서 나는 바나나의 수출은 치키타와 돌 등 미국 기업의 실적과도 직결돼 있었다.

미국은 즉각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에 EU를 제소했다.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WTO는 당연히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별 이유 없이 중남미 국가들이 수출하는 바나나에만 높은 관세를 물리는 것은 자유무역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EU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이 강대국이라 해도 자신들은 무려 유럽 ‘연합’이었다. 이들이 다른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연합을 만든 이유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미국 같은 초강대국과 비등하게 싸우기 위해서였다. EU는 애초부터 바나나 분쟁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1999년 미국이 EU를 향한 무역 보복의 칼을 꺼내들었다. EU가 수출하는 치즈와 캐시미어 등 14개 품목에 무려 100%의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한마디로 EU보고 “우리한테는 치즈와 캐시미어 등을 수출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연합’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했던 EU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EU는 미국 항공기의 EU 상공 통과를 막았다. “미국의 노후 항공기가 안전하지 않아 추락의 위험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자 미국도 “EU의 콩코드 여객기는 소음이 너무 심하다.”며 이 항공기의 미국 취항을 막았다. 진짜 유치짬뽕 아닌가?

물론 이 유치짬뽕한 일이 벌어진 데에는 좀 더 심오한 이유가 있긴 하다. 미국과 EU 모두 항공기 수출로 큰 돈을 버는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펴볼 터이니 이번 기사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속사정이 있다 한들, 이들이 항공기를 두고 벌인 이 분쟁은 실로 유치짬뽕이었다. 그리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제국주의 국가와 19세기를 호령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 유치짬뽕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후 이 싸움은 EU가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 금지하는 등 악화일로를 걷다가 2009년 말 EU가 중남미 지역으로부터 수입되던 바나나의 관세를 내리고 ACP 지역이 수출하던 바나나에도 관세를 받기로 합의하면서 막을 내렸다. 양측은 2012년 WTO에 제소했던 분쟁을 모두 일괄타결하며 유치짬뽕한 싸움을 마무리했다. 외형상 승리는 20세기 최강대국 미국의 몫이었다.

하지만 누가 이겼건 이 분쟁을 통해 강대국들의 추악한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원활한 자유무역을 위해 WTO를 만든 것도 이들 강대국이었고, “자유무역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며 약소국들의 시장을 강제로 개방토록 한 것도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자들이 정작 자국의 이익이 걸리자 “니네 비행기는 낡았어.” ,“니네 비행기는 시끄러워.” 이러면서 무역 보복을 주고받은 것이다. 그것도 장장 20년 가까이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과일’ 바나나는 이렇게 세계 경제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미국과 EU의 바나나 분쟁은 강대국들의 이중성을 만천하에 알린 채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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