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적자를 만회하는 제국주의의 가장 비열한 방법 _ 아편 전쟁

[연재] 설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 ①

*편집자 주 - 지난 추석에 이어 설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무역 적자를 만회하는 제국주의의 가장 비열한 방법 _ 아편 전쟁
② 풍요와 빈곤이 동시에 시작되다 _ 산업혁명
③ 구 제국주의와 신 제국주의의 코미디 같은 대리전 _ 바나나 전쟁
④ 이스라엘의 탐욕이 초래한 나비효과 _ 석유파동
⑤ 미국, 소련 경제의 아킬레스건을 노리다 _ 소련 경제 붕괴 작전


경제학에는 한계효용체감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독일(당시 프러시아)의 경제학자였던 헤르만 하인리히 고센(Hermann Heinrich Gossen, 1810~1858)의 이름을 따 ‘고센의 제1법칙’이라고도 불린다. 내용인즉슨 “같은 재화를 반복해서 소비할 때 개인이 느끼는 만족도는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배가 아주 고플 때 자장면을 먹으면 매우 맛있다. 이때의 만족도가 100점쯤 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또 한 그릇을 먹으면? 첫 번째 그릇만큼 맛있을 수가 없다. 이미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그릇의 만족도는 대략 80점쯤 할 것이다.

이 상태에서 세 번째 자장면을 먹으면 만족도는 20점쯤으로 급락한다. 네 그릇째 먹으면? 이때부터 자장면은 만족을 주는 재화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도구가 된다. 이때의 만족도는 빵점, 혹은 마이너스(먹자마자 토하는 상황)로 추락한다.

우리는 보통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면 매우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돈에도 적용된다. 수입이 1,000만 원이었다가 2,000만 원으로 뛰면 날아갈 듯 기쁘다. 그런데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으로 오르면, 기쁘긴 한데 옛날처럼 기쁘지는 않다.

연봉이 10억 원에서 10억 1,000만 원이 되면 감흥조차 느끼지 못한다. 1,000만 원이 주는 한계효용은 이렇게 계속 감소한다. 실제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 1926~)은 소득이 증가하면 일정 수준까지는 행복도 증가하지만, 그 일정 수준을 넘으면 소득 증가가 행복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이스털린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 또한 돈이 주는 한계효용이 계속 감소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런데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도 예외가 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재화는 반복해서 소비할수록 만족이 체감하는데,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만족도가 더 늘어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게 바로 마약이다.

마약의 핵심은 중독성이다. 다른 재화는 사용할수록 지겨워진다. 하지만 마약의 중독성은 이 지겨움을 상쇄한다. 지겹기는커녕 그것을 사용할수록 더 많은 양의 마약을 열망한다. 한계효용의 법칙에 어긋나는 재화, 이것은 사실 경제학적으로 엄청난 발견이다.

기업이 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는 같은 상품으로는 소비자들을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약은 다르다. 같은 상품만으로도 얼마든지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 오히려 만족이 과해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마약을 상품으로 팔 수 있다면 그 기업은 혁신 따위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앉아서 같은 제품을 수십, 수백 년 동안 팔면 된다. 실로 쉬운 돈벌이 아닌가?

물론 마약은 인체에 심각한 해를 끼치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은 제조와 판매가 불법이다. 하지만 상식이 통용되지 않던 제국주의의 시대에 이처럼 쉬운 돈벌이를 제국주의자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돈이 된다면 사람도 노예로 사고팔았던 이들 아닌가?

그래서 이 파렴치한 제국주의자들은 결국 마약을 돈벌이 수단으로, 그리고 식민지 통치의 수단으로 삼고 말았다. 이 몰염치함으로 인해 발발한 전쟁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산업혁명, 청의 인구 앞에 무용지물


일반적으로 공업이 발달한 선진국과 농어업에 주력하는 후진국이 무역을 하면 선진국이 단연 유리하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이 세계 최강대국에 오른 이유도,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면서까지 영국에 맞서려 했던 이유도 영국이 세계적인 공업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세기 세계 무역계에서 이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가 등장했다. 바로 중국, 즉 청나라였다. 당시 청은 공업화의 징후조차 없었던 심각한 산업 후진국이었다. 그런데 당시 최강의 공업국가였던 영국은 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입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공업화된 선진국이 후진국과 무역을 할 때 갖는 최대 강점은 제품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다. 기계화를 통해 양질의 물건을 빠르게 생산할 수 있기에 제품의 질과 가격 경쟁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아편전쟁 당시 모습 ⓒ기타

그런데 청은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는 나라였다. 당시 청의 인구는 이미 4억 명을 넘어섰다. 게다가 강력한 황제가 지배하는 봉건 시스템을 기반으로 청은 이 어마어마한 인구를 압도적으로 싼 가격에 부려먹을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의 최대 수출품은 싸고 질 좋은 면직물이었는데 이 천은 청에서 전혀 경쟁력을 갖지 못했다. 4억이 넘는 인구를 바탕으로 청은 자기들이 필요한 양질의 천을 충분히 싼 가격에 생산했기 때문이다. 가내수공업과 공장공업이 붙으면 공장공업이 이기는 것이 상식인데, 청의 4억 인구는 이 상식을 박살냈다.

반면 청의 주력 제품은 영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들, 즉 차(茶)와 도자기, 비단과 동양풍의 가구 등이었다. 영국 국민들은 난생 처음 보는 청의 아름다운 도자기와 가구, 그리고 부드러운 비단에 열광했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청 도자기와 가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 불리는 중국 풍 미술작품이 유럽에서 열풍을 일으킨 때도 이 무렵이었다.

게다가 영국 국민들은 커피를 즐겨 마셨던 다른 유럽 사람들과 달리 차에 흠뻑 빠졌다. 오후 2~3시경 홍차 한 잔과 간단한 스낵을 즐기는 티타임(teatime)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영국의 전통이다. 물론 무식한(!) 영국인들이 차에 우유와 설탕을 타서 먹는 바람에 맑은 차를 즐기던 중국인들을 경악시키기는 했지만 말이다.

영국은 청이 원하는 물건을 갖지 않았는데 청은 영국이 원하는 물건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면 이 무역은 해보나 마나였다. 1817년부터 1833년까지 청이 차 수출로 영국으로부터 벌어들인 돈이 은화로 4,000만 냥이 넘었다. 이 막대한 은화를 감당하느라 영국의 은화가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가장 비열했던 무역


영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무역적자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이때 영국 상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이 무역적자를 만회하려고 했다. 바로 아편을 청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영란전쟁 이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등 유럽 여러 국가를 누르고 인도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인도 일대에는 양귀비꽃이 널리 재배되고 있었다. 약간 덜 익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를 내면 하얀 즙이 나오는데 이것을 가공하면 아편이 된다. 그리고 이 아편은 당시 유럽에서 꽤 널리 사용되던 마취제였다. 즉 아편은 의약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영국 상인들은 아편의 중독성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들은 마취제로 써야 할 아편을, 그것도 거의 정제가 되지 않은 생아편을 청에 수출했다. 생아편은 정제된 아편에 비해 중독성이 훨씬 강하다.

멋도 모르고 아편에 손을 댄 청 국민들은 삽시간에 아편에 점령당했다. 희뿌연 연기를 뿜어대는 아편굴이 방방곡곡에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마약은 쓰면 쓸수록 더 쓰고 싶어지는, 즉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적용받지 않는 상품이다. 영국은 아편 하나로 무역적자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ited Nations Office on Drugs and Crime)에 따르면 1775년까지 청에 유입된 아편의 양은 고작 75톤이었다. 하지만 1800년 이 양이 세 배 가까이(200톤)로 늘어나더니 1835년 1,390톤, 1839년 2,553톤으로 기하급수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아편 대금은 은으로 지불됐는데, 이 바람에 청의 은화는 진공청소기에 빨리듯 영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1800년부터 1839년까지 아편으로 유출된 청의 은은 대략 6억 냥 정도로 추산된다. 1817년부터 1833년까지 청이 차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은화 4,000만 냥인 점을 감안하면 청이 아편으로 날려먹은 은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더 큰 문제는 아편 중독자가 급증하면서 청이 더 이상 정상적인 국민경제 활동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한 나라가 됐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아편 중독자가 어찌 농사를 짓고 어찌 세금을 낸단 말인가? 아편 중독자에게 총칼을 맡겨 국방의 의무를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두 차례의 전쟁과 청의 몰락


참다못한 청이 칼을 빼들었다. 청 황실이 아편 문제에 초강경이었던 임칙서(林則徐)를 아편이 수입되던 광저우 지역을 관리하는 호광총독(湖廣總督)으로 임명한 것이다. 1839년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아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광동(광저우는 광동의 성도)을 떠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편 금지령을 위반한 1,600명을 체포했고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해 물에 녹여버렸다. 영국 측이 “사유재산 강탈”이라며 반발했지만 임칙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을 무력으로 침탈 중이던 영국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이듬해인 1840년 6월, 영국은 약 4,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청으로 진격했다.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은 우리”라는 중화사상에 물들었던 중국과, 막강한 해군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을 침탈해온 영국의 전쟁은 그야말로 동서양 최강대국의 일전이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아편전쟁의 결과는 허무할 정도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 영국의 면직물은 청의 거대한 인구 앞에 맥을 못 췄지만, 영국의 최신식 군함과 대포는 달랐다. 전쟁은 청의 참담한 패배로 마무리됐다.

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은 난징조약은 청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 조약에서 청은 영국에게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를 물어야 했고,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는 치욕까지 겪었다.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굴욕적으로 개항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1856년부터 1860년까지 2차 아편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은 사실 아편과 별 상관이 없었다. 청의 개방을 더 가속화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막무가내로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전쟁에서마저 청이 참패하면서 청은 서구 열강에 완전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심지어 전쟁 이후 맺어진 톈진조약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아편 무역을 합법화한다.’는 항목까지 삽입했다. 1차 아편전쟁(1839년) 직전 2,553톤이었던 청의 아편 수입량은 2차 아편전쟁 이후인 1863년 4,232톤, 1880년 6,500톤으로 또 다시 폭증했다. 영국이 청나라 전체를 아편 소굴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아무리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더라도 넘어서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특히 돈 좀 벌겠다고 마약 무역을 합법화하는 것은 인류의 상식에 결코 맞지 않는다. 그런데도 19새기 영국은 이런 짓을 저질렀다.

영국을 흔히 ‘신사의 나라’라고 부르는데 실로 가증스럽지 않은가? 신사의 나라라는 표현 자체부터 성차별적이지만, 백보를 양보해 그게 긍정적 의미라고 치자. 남의 나라에 마약 합법화를 강요하는 자들을 어디를 봐서 젠틀맨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당최 이해를 할 수 없다. 아무튼 역사상 가장 비열했던 무역전쟁은 이렇게 영국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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