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국 증시 갈라파고스 벗어나야

지난 2015년 7월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제일모직과의 합병 관련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입장을 위해 본인확인을 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국장은 하는 거 아니다’

한국 증시는 뭐가 다르길래 자조 섞인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걸까.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등 주요 산업만 봐도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기술력과 영업력을 인정받는데 코스피는 왜 외면받을까.

다른 국가와 비교해 한국 증시의 가장 큰 특징은 재벌 총수일가 대주주의 존재다. 상속받은 지분으로 회사를 장악하면서 다음 상속을 준비한다. 게다가 한국은 회사가 총수일가 이익을 위해 일반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결정을 해도 상법상 제재하지 않는다. 투자자는 회사 결정 사안이 총수일가를 위한 건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된다. 실제 총수일가는 다양한 위법과 편법으로 사익을 편취한다. 그 과정에서 일반주주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강요당한다. 총수일가 대주주의 존재,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제재 수단의 부재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는 배경이다.

제도적으로 보면, 회사의 주요 경영 사안을 결정하는 이사의 책임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의 문제다. 현행 상법은 이사 충실의무 대상으로 회사만 인정하고, 주주는 포함하지 않는다. 이사는 주주에 대한 책임이 없다. 회사 이익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총수일가와 일반주주 이해관계가 상충할 경우, 총수일가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해도 충실의무를 위배했다고 보지 않는다.

총수일가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사는 총수일가에 유리하게 결정하기 마련이다. 총수일가와 일반주주 간 이해상충 사안에 있어 특정 주주가 아닌 모든 주주의 공통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하도록 해야 한다. 상법을 개정해 이사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면 된다. 

재계는 상법 개정 여론을 무마하기에 급급하다. 한국경제인협회 등 8개 경제단체는 지난 25일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상법 개정 계획에 반대하는 공동건의서를 정부와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이사 충실의무 확대가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했다.

사실과 다르다. 회사가 일반주주 이익을 무시하고 대주주에게만 유리한 결정을 하도록 허용하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각국 투자자의 자금이 국경을 넘나드는 주식 투자의 세계에서 한국은 갈라파고스다.

‘G20/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이사회의 책임 항목에 “이사회 구성원은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판례로 정립돼 있다. 의사결정이 공정하게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일례로, 테슬라가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에게 수십조원의 성과 보상을 지급하는 안건을 의결할 때, 머스크와 그의 동생인 킴벌은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일본은 2015년 기업 지배구조 코드를 제정해, 주주에 대한 이사의 책임을 명시했다. 독일은 이사가 아니라 대주주가 직접 충실의무를 부담하도록 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논평에서 “주주 충실의무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고, 거의 모든 선진국의 법에서 볼 수 있다”며 경제단체를 향해 “왜 이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재계는 총수일가 이익을 위해 일반주주가 손해를 보더라도 제재하지 말라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경제단체 건의서를 보면, “(주주 충실의무 도입 시) 회사 합병·분할이나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지분율이 희석됐다는 이유만으로 충실의무 위반을 주장할 수 있다”고 적었다. 그간 재벌 총수일가는 합병·분할을 통해 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강화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으로 삼성물산을 삼켰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쪼개기 상장을 통해 외부 자금을 유치하면서도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삼성물산 주주는 헐값에 주식을 넘겨야 했고, LG화학 주주는 배터리 사업이 빠진 껍데기 회사 주식만 남게 됐다.

경제단체 건의서에서 총수일가 지배력을 성역으로 보는 인식이 드러난다.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되면, 경영권 방어 수단 용도의 자사주 취득 결정에 대해 이사가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다고 했다. 회삿돈으로 자사주를 사놓고 소각하지 않는 건 편법을 활용한 대표적인 지배력 확보 수단이다. 지배력을 확보하려면 총수일가 사비로 주식을 사는 게 마땅하다. 재계는 총수일가 개인의 지배력 확보를 제도적으로 보장해달라는 뻔뻔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거버넌포럼은 “지배주주(대주주)가 곧 회사라는 생각 없이는 이런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꼬집었다.

총수일가 문제에 관한 한 재계는 자정 능력이 없다. 제도를 통한 규제가 답이다. 원칙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 세부적인 사항을 규제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삼성을 필두로 한 재벌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일반주주의 주주권 침해를 자행해 왔다. 대주주와 일반주주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주 충실의무 도입이 필요한 이유다.

21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된 주주 충실의무 확대 관련 상법 개정안이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됐다. 정부도 관련 법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투자자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신속히 마련해 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사안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이사 충실의무 확대가 필요하다면서, 배임죄 폐지를 병행하는 방안을 언급했다. 배임죄를 폐지하면 총수일가 사익편취 제재가 어려워져 이사 충실의무 확대를 형해화할 우려가 크다.

윤석열 정권의 국정 파행으로 정치적 갈등이 심화하면서 경제 현안이 뒷전으로 밀렸다. 여야는 주주 충실의무 도입 상법 개정에 합의해 일하는 국회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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