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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의 지정학 산책] 압둘라를 아시나요?

2003년 체포되어 현재 20년이 넘게 수감중인 압둘라 바르구티Abdullah Barghouti의 형량은 종신형 67회에 징역 5,200년이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 최대 형량이지 싶다. 그가 체포된 데에는 하마스의 창립자중 일인인 세이크 하산 유세프의 큰아들 모삽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모삽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이스라엘의 악명높은 정보기관 모사드와 쌍벽을 이루는 신베트의 프락치(암호명 ‘그린 프린스’)였다고 한다. 모삽은 2000년 2차 인티파다 때부터 약 10년간 프락치활동을 했고 2003년 하마스의 군사조직 알카삼 여단 사령관 이브라힘 하미드와 압둘라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 정보를 제공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팔레스타인 지역 거리에 한 남성이 앉아 있다. ⓒpixabay


압둘라는 1972년 쿠웨이트생인데, 1990년 걸프전 이후 요르단으로 이주한 요르단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그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헌신하게 된 계기는 제1차 인티파다였다. 이때 그의 삼촌과 사촌이 살해당했다. 즉 이스라엘 점령군에게 돌을 던졌다는 이유로 그들은 사살당했다고 한다. 그는 옥중에서 ‘어둠의 왕자, 길위의 엔지니어Prince of Shadow, Engineer on the Road’라는 회고록을 냈다. 아래는 이 회고록의 발췌기사 중 한국에 관련된 일부이다.

요르단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대학진학을 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1년 안에 꼭 갚겠다는 말과 함께 친지로부터 돈을 빌려 18세가 되기 전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지만 돈을 벌진 못했다. 압둘라가 한국으로 가게된 것은 우연히 한국에 가는 비자신청서 작성을 도와달라는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한국행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탄 비행기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수중에는 친구가 준 주소지로 갈 기차나 버스 삯조차도 없었다.

“사흘 낮과 이틀 밤 동안 먹지도 못한 채 나는 낮에는 걷고 밤에는 잤다. 친구가 준 주소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공원의 수돗물을 마시며 버텼고 완전히 지친 채 비에 젖었다. 친구가 준 주소지는 숲속의 제재소였다. 밥 먹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45일 동안 제재소에서 일하면서 제재소에서 주는 밥에 의지했는데 점심에는 아주 적은 양만 먹을 수 있었다. 말없이 일만했고 내 일에 숙련될 수가 있었다.”

몇 달 동안 제재소에서 일한 뒤 압둘라는 기계공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동시에 기술학교에서 공부한다. 그의 전공은 전자공학이었다.

“나는 심장은 없었지만 2가지 정신은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돈 버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법에 맞서는 일이었다. 나는 컴퓨터 해커가 되었다. 통신망 해커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 정신이었다. 나는 오리지널 소스를 통해 또 인터넷상의 군사사이트를 통해 폭발물과 사제폭탄 제조법을 공부했다. 수많은 지식과 그에 대한 실제 경험도 얻었다. 주말이면 한국의 숲속에서 폭탄을 폭파시키고 새로운 인화물질을 실험하면서 보냈다. 나는 폭발물을 전자 기폭장치에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전자장치와 폭발물 이 2개 분야에 전문가가 되었다.”

한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압둘라는 한국의 어떤 학생과 결혼한다. 그러나 압둘라는 한국 여성이 미군에 강간 당한 사건에 항의하는 한국 대학생 시위에 가담한 직후 수갑을 차고 요르단으로 강제송환 되었다.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압둘라는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고 그래서 체포된 뒤 예멘대사의 탄원으로 겨우 석방되어 요르단으로 추방된 것이다. 한국정부는 압둘라의 계좌를 동결했고 따라서 그는 한국으로 떠날 때처럼 빈털털이가 되어 귀국했다.

요르단으로 강제송환 되고 또 한국여성과 이혼한 뒤 압둘라는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그가 이혼하던 때가 마침 그가 반대하던 오슬로협정이 체결되었던 때였다. 이후 압둘라는 어머니가 골라 둔 팔레스타인 신부와 결혼하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인 베이트 리마를 여행한 뒤 알 쿠드스(예루살렘)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때를 압둘라는 이렇게 회상한다.

“예루살렘 카악을 만드는 빵가게 앞을 지나면서 빵을 좀 샀다. 빵을 먹으면서 예루살렘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나는 팔레스타인 전부를 해방시킬 것을 결심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스트들을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 오슬로의 가짜를 몰아내기로 말이다. 나는 되풀이해서 바다에 맹세했다.”

2003년 3월 5일 어린 딸을 데리고 집 계약을 위해 부동산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압둘라는 경찰견의 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약 5개월간 고문을 받은 뒤 기소되어 5,200년의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 때까지 압둘라는 하마스의 알카셈 여단의 폭발물전문가로 여러 건의 테러공격을 지휘하고 실행했다. 9년 동안 독방에 수감되었다 해제된 뒤 2015년 팔레스타인 지방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카삼 여단에게 이스라엘과 포로교환 협상을 서둘지 말라는 성명을 낸 뒤 다시 독방에 수감되었다.

압둘라 이야기는 아주 드문 팔레스타인인의 한국디아스포라 기록이다. 어떤 조선족의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기록이 있는데 ‘깐수’ 정수일 교수다. 묘한 기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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