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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오래 이어지는 음악팬의 세상, 어떻게 가능할까

음반 판매점에 진열된 음반들 ⓒ뉴시스

대중음악 강의를 하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세대가 다양하고 직업이 다르며 취향 역시 제각각인 사람들이다. 한 강의실에 모여 있지만,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이들은 음악에 대한 판단과 기호가 다른 게 당연하다.

사실 대중음악 강의를 들으러 올 정도면 꽤 적극적인 음악팬이다. 그럼에도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며 다양한 음악을 꾸준히 듣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히트했던 곡이나, 그 때 좋아했던 음악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 가령 한국대중음악 명반 100장에 뽑힌 음반을 다 찾아듣고, 그 음반의 가치를 모두 이해하며,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이들은 매우 적다. 1970년대에 김민기, 방의경, 한대수, 이장희를 흥얼거렸던 이들이 1980년대의 어떤날과 시인과촌장은 모르는 식이다. 1980년대에 어떤날과 시인과촌장을 들었는데, 1990년대의 장필순과 미선이는 모른다. 2020년대의 강태구, 이랑은 아예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1970년대에 신중현과 히식스와 산울림을 들었던 이들이 1980년대에는 들국화, 시나위, 백두산, 부활까지는 들었지만 그 이후의 넥스트, 델리 스파이스는 모르는 현실이랄까. 그렇다면 1990년대에 넥스트, 델리 스파이스, 유앤미블루, 크래쉬를 애청했던 이들은 지금 세이수미나 다크 미러 오브 트래저디를 듣고 있을까.

아쉽게도 강의에서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단절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음악팬들은 세대와 취향에 따라 폭격당한 다리처럼 갈라져있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 물론 음악 듣는 게 일인 사람과 다른 일로 생업을 하는 사람의 귀는 다르게 채워지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삶은 젊은 날의 음악팬조차 음악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일쑤다. 음악 듣는 일이 돈이 되지 않고, 음악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음악을 찾아 듣지 않게 된다. 그럴 여유가 없고, 어디서 어떻게 어떤 음악을 찾아들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고 김광석 ⓒ김광석추모사업회 제공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 음악을 찾아듣지 않는다. 남이 듣는 히트곡을 따라 듣거나, 예전에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고,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을 뿐이다. 대중적으로 히트하지 않은 곡은 수많은 이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곡이나 마찬가지다. 1990년대엔 너바나가 시대를 풍미했다지만 우리나라에는 너바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음악팬들이 좋아하는 장르 음악들 대부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음악을 모르는지부터 모른다.

계속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지 않거나, 음악을 다양하게 듣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 사운드, 다른 어법으로 말하는 음악을 감각적으로 수용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한 장르의 음악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모르게 된다. 1990년대의 김광석은 알고, 2020년대의 황푸하는 모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좋은 음악이라고 모두에게 다 통하지는 않는다. 1990년대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중장년이 드물었듯, 요즘 뉴진스의 노래가 히트곡이라는데 그 노래가 왜 좋은지 모르겠는 중장년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젊은 세대가 아니면 내심 비슷한 생각을 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10대~20대였던 시절 형성된 감수성에 친숙한 어법을 최고로 알고 살아가며, 그 감수성을 일부러 확장하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이다. 중장년들이 옛날에는 좋은 노래가 많았는데 요즘 노래가 노래냐고 비난하는 이유다. 어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발라드가 꾸준히 인기를 얻는 이유다.

황푸하 ⓒ황푸하

모르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이 음악뿐일까. 누군가가 열광하는 스포츠의 재미와 감동을 다른 누군가는 아예 모를 것이다. 문학에 대해, 영화에 대해, 연극에 대해, 미술에 대해, 혹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삶이나 무언가를 만드는 취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박찬욱 감독을 호평하면서 고 김기영 감독은 모르거나 그 반대의 경우처럼 말이다. 다만 내가 음악을 선호하고 음악을 이야기하며 생계를 유지하니 그에 대해서는 겨우 따라가고 있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나 역시 무지렁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문화예술 분야의 역사와 트렌드를 다 이해하기는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래서 음악 강의를 할 때면 최대한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려고 노력한다. 대중음악 생태계는 항상 다양한 장르, 사운드, 메시지, 지역 등의 정체성과 지향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밀림이다. 낯선 대상은 없었던 게 아니라 몰랐던 쪽에 가깝다. 히트곡만 들려주거나,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음악만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항상 예술적인 음악과 대중적인 음악이 공존하고, 그 차이는 인기와 연결되거나 무관하다. 영화로 치면 1,000만 영화만 나오지는 않은 식이다.

물론 내가 다양한 음악을 소개한다고 그 음악을 모두 즐겨 듣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추억이 없는 음악은 오래 곁에 머물지 못한다. 잠깐 듣는다고 즉시 감각이 확장되기는 어렵다. 팝의 대중성을 특정 장르가 이기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음악이 삶으로 들어오려면 친근하기도 해야 하지만, 개개인의 삶과 엮이는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음악 감상 (자료사진) ⓒMinh Thái Lê, Pixabay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다양한 음악을 꾸준히 듣고 받아들이게 될까. 트렌디하거나 다른 어법의 음악의 맛과 가치를 아는 이들이 늘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좋아했던 장르의 새 음악을 계속 듣게 하려면 어떤 장치가 있어야 할까. 여유와 설빈, 실리카겔 같은 음악인들의 음악이 지금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세상이 되려면 어떤 변화와 접근이 필요할까. 1970년대 신중현과 히식스와 데블스를 들었던 이들이 파란노을과 소음발광의 콘서트에 찾아오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역시 온오프라인 매체의 역할이 중요한 걸까.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불평등이 해소되어 여가시간이 늘어나는 게 최고의 방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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