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정훈의 학교 밖 세상] ‘헬조선’ 그대로 두고 저출생 대책이 있나?

총선 패배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에 ‘저출생대응기획부’를 신설하고 대통령실에 ‘저출생수석실’ 설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저출생 관련 정책들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헝가리식 저출산 대책’을 주장했던 나경원 의원은 헝가리식 대책 법안을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제출한다고 합니다. 신혼부부가 주택자금을 2억 원 이상 대출받을 경우 이자를 1% 이내로 해주고, 첫째를 낳으면 이자 전액을, 둘째를 낳으면 이자 전액과 원금의 1/3을, 셋째를 낳으면 이자 전액과 원금의 2/3를, 넷째 이상부터는 이자와 원금을 모두 면제한다는 것입니다.

연구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아이 한 명을 낳아 대학을 졸업시킬 때까지 필요한 돈이 4억에 이른다고 합니다. 뜬금없이 헝가리식 대책을 가져온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아이 하나 키우는데 4억 가까이 드는데 주택 대출 이자 면제해주고 원금 깎아준다고 애를 낳을 부부가 얼마나 있을까요?

초등학교 입학 자료사진. 2021.03.02 ⓒ사진공동취재단

나경원 의원 주장은 그래도 점잖은 편입니다. 지난달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재정포럼’ 5월호에 실은 저출생 대책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여학생을 1년 조기 입학시켜 적령기 남녀가 서로 매력을 더 느끼게 하자고 합니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연구기관이 개그콘서트에서나 할 만담을 저출생 대책으로 내놓다니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아이 낳으면 대출이자 면제, 여자 아이 조기 입학...
전쟁 중인 나라보다 출생률 낮은 대한민국 현실 안 바뀌어
청년을 착취 대상으로 삼는 비정한 자본주의 바꿔야

 
2002년 한국이 초저출산 사회(합계출산율 1.3명 이하)에 진입하면서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제정되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되어 2006년부터 2022년까지 322조 원의 예산이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합계출산율은 계속 떨어졌고 세계에서 압도적 꼴찌가 되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저출생 대책이 실패했으면 이제 근본적 문제를 성찰할 때도 되었는데, 저출생 대책은 성찰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대 정부가 내놓은 저출생 대책은 대부분 아이를 낳으면 무엇을 지원해 주겠다는 정책입니다. 결혼을 해야 아이를 낳을 텐데 직장이 비정규직이라 미래가 불투명하고, 직장에서는 열정 페이에 착취당하고, 집값은 너무 비싸 결혼할 엄두를 못 내는 청년들에게 출산을 전제로 한 저출생 대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출생 대책은 답이 명확히 있습니다. 청년들이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일자리를 정규직화하고, 임금을 높이고, 집값을 낮추고, 교육 경쟁을 완화하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정답인지 구체적 통계를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작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한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저출생의 근본 문제는 가난해서 결혼을 못 하는 것입니다. 36~40세 남성 중 한 번이라도 결혼한 적 있는 남성의 비율이 소득 상위 10%는 91%, 하위 10%는 47%입니다. 소득과 혼인율이 정확히 비례합니다. 정규직으로 소득이 보장되는 남자는 결혼하고, 비정규직으로 저소득에 고통받는 남자는 결혼에 이르지 못합니다.

작년 5월 통계청의 경제활동 인구 조사 중 청년층(15~29세 841만 명) 부가 조사 결과는 청년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보여줍니다. 학교 졸업(또는 중퇴)자의 38.6%는 백수 상태입니다. 백수 상태가 1년 이상인 경우가 45.3%, 백수 기간 중 ‘그냥 시간을 보냈다’는 비율이 25.3%입니다.

취업 경험이 있는 청년 중 첫 직장이 계약직·임시직이었던 경우가 46%입니다. 첫 직장의 월급이 200만 원 이하인 경우가 51.4%, 150만 원 이하인 경우도 15.7%입니다. 2023년 최저임금 기준으로 주당 40시간 일했을 때 임금이 201만 원이니 절반이 넘게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했다는 것입니다. 첫 직장의 근속 기간은 평균 1년 2개월인데, 그만둔 이유 중 보수와 근로시간에 대한 불만이 45.9%입니다. 삶을 계획할 만한 안정된 직장이 없고, 월급도 최저임금 수준인데 무슨 전망을 갖고 결혼해서 애를 낳겠습니까?

헬조선, 흙수저·금수저, N포세대 등 비관적 신조어가 등장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 10년 동안 대한민국 위정자들은 청년들의 절규를 외면해 왔습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으로 무장하고도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가 현재의 청년들입니다. 그 청년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헬조선에서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육아휴직 여건 개선, 각종 수당 신설 등 경제적 지원, 아이를 낳은 가정에 대한 주거 지원, 돌봄 대책 등의 대책이 없는 것보다는 낫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 정책으로 청년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금융권 공동 채용박람회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채용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민중의소리

작년 12월 뉴욕 타임스에는 ‘한국은 소멸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칼럼을 쓴 로스 다우서트(Ross Douthat)는 한국의 인구 감소율이 흑사병으로 인구의 1/3이 사망한 14세기 유럽보다 높다고 지적하며, 그 첫 번째 원인으로 한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잔인한 입시 경쟁을 꼽았습니다. 외국 칼럼니스트의 성찰이 한국 위정자들보다 현실적입니다.

대한민국의 출생률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보다 낮고, 테러가 횡행하는 중동 지역보다 낮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포 소리, 총소리는 울리지 않고 있지만 일상의 삶이 전쟁입니다. 취업이 전쟁이고, 직장이 전쟁터입니다. 이를 바꾸지 않고 출생률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권이 바뀌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굳게 뿌리박힌 가혹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바꿔야 합니다. 청년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이 비정한 자본주의 체제를 바꿔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애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사회의 근본적 전환, 그 외에 저출생 대책은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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