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음의 저울] 자유로부터의 도피

민의의 열망이 분출된 총선은 끝났고 총선 결과를 반영하기 위해 여야 영수회담이 진행했지만 정작 심판의 대상이었던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별 태도 변화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살아있는 생명체 등 인간이 접하는 모든 체계는 각각의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체계를 항상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는 이러한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체계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는데 모든 체계는 준안정적 상태로 고정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 체계를 유지 발전하기 위해 역동적인 조정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사회가 너무 개방적인 길로 들어서면 부적인 피드백을 통해 안정성을 추구하고 너무 폐쇄적인 길로 들어서면 정적인 피드백을 통해 개방성을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정적 또는 부적 피드백을 통해 지금의 상태를 수정해 나간다. 예를 들면 사회에서 민의의 열망이 표출되는 선거를 통해 그 사회의 방향과 민의를 수렴함으로써 안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피드백이 반영되지 못하면 사회나 개인은 예상할 수 없는 극심한 변동 속에서 항상성이 무너지고 급기야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체계는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에서 이 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024.04.29. ⓒ뉴시스


윤석열 정권이나 현 집권세력은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야당의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의 추진해온 자신들의 정책이나 국정기조를 바꾸지 못하고 민의를 피드백을 반영하지 못할까?


독일 출신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자유에 열광하던 독일 시민들이 왜 파시즘에 빠져 전쟁광의 선동에 휘둘렸는지를 분석하였다. 우리도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3.1 만세운동, 4.19 항쟁과 6월 항쟁과 같은 굵직한 민중들의 항쟁을 통한 희생자들의 넋으로 지금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얻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의 넋을 통해 얻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몇몇 이념가들의 망상에 가까운 역사왜곡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는 이념전쟁과 과거를 통째로 부정하고 말도 안 되는 정권 말기의 망동적 사건에도 여전히 특정 지역에서 지역주의는 기승을 부렸고 일부세력들은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열광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럴까? 프롬의 분석에 따르면 자신들의 이권과 자유가 제한되어도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질서가 파괴되어도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선호하는 심리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통렬한 책임이 따른다. 실제 가정에서도 한 아이는 부모와 유대를 통해 의존과 연결감을 갖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서 분리되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누구나 고독과 책임감을 감당하고 견디면서 진정한 인간으로서 자유를 끊임없이 갈구하면서 이전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좋은 사회, 바람직한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일관되고 반복적으로 강조해 온 말이 ‘자유’이다
‘자유’는 역사적 사건과 희생을 통해 자리 잡은 중요한 가치임에도
특정 진영을 편 가르는 논쟁적인 개념으로 변질시켰다

 
그러나 자유의 대가로서 얻은 고독과 책임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값비싼 희생을 통해 얻은 자유를 내던지고 전체주의의 망령에 쉽게 열광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위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표를 하는 것은 정치경제적 논리에서 이해가 되지만 하층민이나 중산층들이 여전히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세력과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성격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거나 투표하는 행위는 하나의 이론으로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롬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벗어나 기존의 권위에 맹종하는 사람들의 성격적 특징을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하였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기득권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이나 하류층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쉬운 성격이며 자유와 고독의 무게를 벗어나 새로운 의존과 종속을 추구하는 성향이라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강한 자의 권위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동시에 그 권위를 타인에게 부리고 싶어 한다. 소위 힘 있는 자에게는 한없이 아첨과 복종을 맹세하며 자신보다 힘없는 자들에게는 교만과 거만을 떠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 서면-문현로터리 현장.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참가자가 경찰에 맞서 웃옷을 벗고 달려가고 있다. ⓒ뉴시스

현 정권이 출발한 후 윤석열 대통령이 크고 작은 공식 석상에서 일관되고 반복적으로 강조해 온 말이 ‘자유’이다. ‘자유’는 역사적 사건과 희생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중요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특정 진영을 편 가르는 논쟁적인 개념으로 변질시켰다. 분단 상황과 반도적 국가가 갖는 특성을 무시하고 우리나라를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에 종속적 위치를 자리 지움으로써 동북아의 신냉전질서나 더 이상 외교적으로 의미 없는 국가로 전락되었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규제 철폐의 선봉장이 되었지만 정작 사회적 약자들의 정의나 공정성, 평등적 가치를 주장하는 집단을 자유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여 독재적인 국가로서 가장 빠르게 진입하였다.

선거로도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고 기존의 방식대로 권위주의적 성격에 고착되어 민의의 피드백을 반영하지 못하는 윤석열 정권과 집권세력에게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세력은 역사적으로 예외 없이 불행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엄청난 현실을 직면할 때 그 고통 또한 엄청났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지켜보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호흡을 길게 하고 자신들의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것은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 용기와 강인함을 지니고 자아를 철저하게 긍정하는 일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맹신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길을 갈고 닦으면서 오직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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