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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창극 리어의 성취와 공백

국립창극단 '리어' 공연 ⓒ국립극장

창극 ‘리어’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2년 초연에 이어 올해 다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3월 29일부터 4월 7일까지 공연하는 동안 빈자리를 찾기는 어려웠다. 2022년 초연 때 이미 화제를 모았을 뿐 아니라 관객과 평단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작품이니 당연한 결과다. 정영두가 연출과 안무를 맡고, 배삼식이 대본을 썼으며, 한승석이 작창과 음악감독을 담당한 데다, 정재일이 작곡한 작품이라면 관객이 몰릴 만하다. 더군다나 국립창극단의 스타인 김준수, 유태평양, 이소연, 왕윤정, 민은경이 총출동한작품 아닌가.

창극 ‘리어’는 2010년대부터 이어진 창극 현대화 작업의 연장선이며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전통음악가들끼리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연극과 크로스오버 작업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이 협업함으로써 극의 완성도를 높이고 확장성을 강화했다. 이야기부터 한국의 전통이 아닌 세익스피어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연극무대에서 곧잘 상연하는 고전이다. 권위와 명성을 갖춘 작품을 한국의 대표 예술가들이 협업해 재탄생시켰으며, 그들의 장점이 작품 안에 알알이 피어난다.

창극 ‘리어’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늙은 왕의 몰락이라고 할 수 있을까. 리어를 보는 사람은 주인공 리어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본다. 세상을 다 가졌음에도 달콤한 말을 요구하고 그 말에 속는 인간. 자신의 욕망을 좇았으나 파멸하는 인간 군상의 드라마다.

국립창극단 '리어' 공연사진 ⓒ국립극장

극작가 배삼식은 이 아비규환의 참상을 물의 메타포를 빌어 끌고 간다. 상선은 약수라고 말하며 리어의 지혜를 말하는가 싶더니, 아버님에 대한 사랑 또한 창해와 큰 강을 빌어 부풀린다. 물은 “방죽에 고인 물”이 되어 늙은이의 망령을 빗대다가, “워리렁 출렁 / 주르르르르 콸콸 / 으르렁 철썩 / 처리철철 버썩” 밀려오는 욕망으로 굽이친다. 계속 흐르며 움직이는 물의 운동과 변화는 “사나운 물결”로 치달으며 등장인물의 운명과 욕망을 대리했다가 결국 “한 줄기 안개로 피어 / 허공에 흩어”지며 마침표를 찍는다. 호응하는 무대는 20톤의 물을 채우고, 폭 14m와 깊이 9.6m 크기의 무대에 가득찬 물이 빠져나가게 한 다음 사방 10m의 단이 드러나면서 극을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할은 소리꾼들과 작곡가 정재일의 몫이다. 정재일은 오래 한국전통음악을 탐구하고 창극/뮤지컬 작업을 진행했으며 영화음악 작업을 해온 음악가답게 인물의 상황과 욕망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곡을 써냈다. 소리꾼이 홀로 부르는 곡들뿐만 아니라 코러스가 함께 부르는 노래로도 인물이 살아 꿈틀대니 관객의 심장은 내내 사로잡힌다. 국악기 반주만 활용하지 않고 신시사이저와 현악기를 함께 연주한 곡들은 대개 짧은 길이임에도 절창의 연속이다. 정재일에게 감탄하는 이유다. 타령과 랩을 곁들일 때는 극의 리듬을 조절하며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까지 해낸다. 음반으로 전체 레퍼토리를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욕망으로 불타는 이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몰락하는 드라마가 절창의 연속으로 펼쳐질 때 어느 누가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배삼식은 이 작품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리어/글로스터/코딜리어/에드거는 피해자, 거너릴/리건/에드먼드는 가해자라는 구도를 부각하는 대신 거너릴/리건/에드먼드에도 충분히 말할 기회를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인간의 면모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 된다. 최근 극/영화의 주된 경향을 반복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또한 창극 리어의 차이 가운데 하나다.

“말은 그저 말뿐이요. 이름 그저 이름이라”, “내 살이요, 피인 내 딸아. 너는 내 피 속에 흐르는 병독이요. 삶 속에 자리 잡은 종기. 허나 그것도 나이니, 내 다시는 너를 저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않겠다.”, “아저씬 벌써 그림자야. 그림자의 그림자가 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 “훌떡 한번 재주 넘으니 비루먹은 개 한 마리 / 훌떡 두 번 재주 넘으니 사나운 이리 두 마리 / 누런 늑대 퍼런 승냥이 네 마리 훌떡 여덟 마리 / 흰둥이 검둥이 점박이 복슬이 쌀개 똥개 미친 개 / 워리월월 몰려들어 이빨을 아드득 진침을 질질! 캥캥캥캥 짖어댄다, 눈을 비집고 달려든다!” 같은 대사와 작창의 맛은 일품이다. 여기에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인간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소리꾼들의 호연은 창극 ‘리어’를 매진시키는 원동력이다.

창극으로 재탄생한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수, 국립창극단 '리어'

하지만 정영두, 배삼식, 한승석, 정재일 등의 손길로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공백은 주인공 리어다. 젊은 소리꾼 김준수가 맡은 리어는 그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리어라는 인물을 풍부하게 보여주면서 정당화하지 못한다. 리어가 사리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권력을 다 잃어버린 뒤 가장 사랑하는 딸 코딜리어까지 떠나보내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애정결핍 때문인가. 자만 때문인가. 제작진의 해석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늙어버린 리어가 권력을 내준 후 자멸하는 이야기의 이유와 필연성이 충분히 다가오지 않는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아무리 소리를 잘하는 소리꾼이고, 젊은 소리꾼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을지라도 젊은 소리꾼들은 늙어가는 인간이 총명을 잃고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풍부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이 작품이 노년의 배우들이 리어로 분했던 연극들과 가장 다른 부분인데,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대체 왜 리어는 미쳐버린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않은 채 끝난다. 검은 색으로 가득 채운 무대 또한 극의 암울하고 비감한 정서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늙어 미쳐가는 리어의 변화나 펄펄 살아 움직이는 다른 인물들의 욕망을 표현하기는 역부족이다. 세련된 미장센을 만들려 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극에서 중요한 것은 미장센이 아니다. 연출은 미장센 이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막내딸 코딜리어의 역할도 충분하지 않다. 늙은 아버지와 대비되는 축으로 기능하며 극을 끌고 갈 수 있었을 배역이 비극의 불쏘시개로만 소비되고 말았다. 코딜리어는 결국 심청가의 주인공 심청처럼 아버지와 만났음에도 비극을 완성하기 위한 쓰임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리어는 “이 고요를 위하여 / 적막을 위하여 / 그 모든 소란이 필요했던가”라고 질문하기 위해 달려온 작품일까. 이 질문은 얼마나 묵직하고 날카로운가. 리어는 이 질문만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극의 완성도가 높고 음악 또한 빼어나 잘 만든 극을 보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오늘의 삶을 뒤흔드는 충격을 안기거나 현재의 관객들에게 곱씹을 질문을 던졌다고 보기는 부족하다. 이 공백이 다음 공연에서 채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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