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정일 칼럼] 국가보안법의 숨은 수호자들

국보법(국가보안법)을 없애자고 할 때마다 보수 인사와 언론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 국보법 때문에 불편한 사람, 국보법이 두려운 사람이 누구냐? 간첩 말고 누가 불편하고, 두려운 거냐?” 또 보수는 아니라면서도 국보법에 무심한 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국보법이 무슨 큰 문제가 되고 있나? 민생이 문제지.” 보수 인사나 국보법에 무심한 시민들만 아니라, 국보법 피해자들마저도 평소에 당신들처럼 말했다.

소위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이나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은 국보법 폐지에 대해 “우리도 그러고 싶지만 빨갱이 콤플렉스 때문에 하지 못하는 거”라고 말한다. 일정 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김호는 국보법과 ‘368 정치인’의 밀월을 분석·고발한 『니체 대 문재인』(보민출판사,2024)에서 문재인 정권과 386 정치인은 국보법을 폐지할 의지나 의사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국보법 수호자’들이라고 말한다.

2004년 9월 5일 MBC ‘시사매거진 2580’에 출연하여 국보법 폐지 당위성을 강조한 노무현 전 대통령 ⓒ자료사진

문재인을 노무현의 ‘아바타’라고 말들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노무현은 명분을 세우고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힘으로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반면 문재인의 정치적 소질은 무소신과 갈등 회피다. 2004년 9월 5일 노무현 대통령은 MBC [시사매거진 2580]에 출연하여 국보법 폐지를 공론에 부쳤다. “(국보법은)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처벌한 것이 아니라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주로 압도적으로 많이 쓰여왔습니다. 말하자면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을 탄압하는 법으로 많이 쓰여왔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권탄압이 있었고 비인도적인 행위들이 저질러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이고 지금은 쓸 수도 없는, 독재시대에 있었던 낡은 유물입니다.”

아바타는 달랐다. 2017년 4월 19일, KBS에서 열린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국보법의 “찬양·고무조항은 개선돼야 한다”면서도, 당장은 국보법 폐지가 어렵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에둘러 밝힐 때, ‘당장은 어렵다’거나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김호는 “예수를 부정하던 유다처럼 국보법 철폐를 주장한 전임 노무현 대통령을 부정했다.”(413쪽)라고 썼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과반수를 차지한 여당 의원을 거느리고도 국보법에 대해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그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삼으려고 했던 남북정상회담 합의문(4ㆍ27 판문점 선언)을 다듬는 사이에도, 한편에서는 적지 않은 국보법 희생자들이 돌이키기 힘든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2018~2019년까지 국가보안법 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람만 583명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이 악법으로 고통 받고 있다. 멀쩡하게 당국의 승인을 받고 남북경협을 추진하던 사업가가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패가망신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당국의 승인 아래 진행한 일을 두고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 경찰에 불려가 취조를 당하는 북한 연구자도 있다.”(2021년 1월 17일 [통일뉴스], 평화철도 사무처장 정용일)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국보법 폐지를 거론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와 원내 과반 민주당
NL, PD로 대립한 80년대 운동권도 자주와 반미 존중


문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발탁했던 조국도 유다였다. 국보법 위반자로는 최초로 경찰·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감시하는 민정수석이 되었던 그는, 그 자리에 있는 동안 국보법 철폐, 양심수 석방, 공안조직 해체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공안검사 이인걸을 특별감찰반장으로 임명했다. 이 자는 2017년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인 2013년 9월, 법무부가 설치한 ‘위헌 정당ㆍ단체 관련 대책 TF’에 소속돼 통합진보당(통진당)의 이적성을 주장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이런 사람을 민정수석실에 두었으니, 문 정권 내내 통진당 해산에 대한 재조사는 물론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한 사면이나 가석방이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 선 조국은 “궁극적으로, 장기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라는 말로, 적어도 자신의 임기 중에는 국보법 폐지 시도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 말은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처럼 한 가족이 일사불란하게 저지른 입시 부정으로 위기에 봉착한 그가 보수 진영의 호의를 얻기 위해 준비한 아부성 발언이 아니다. 386 정치인들에게 국보법은 자신들의 투쟁성과 도덕성을 보증하는 훈장으로만 존재한다. 조국처럼 국보법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이인영 또한 더불어민주당 원내 대표 시절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보안법 철폐는 “나중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통일부 장관이 되어서도 국보법이 문 정부가 내건 평화경제와 민간의 대륙(중국) 진출을 막는 걸림돌이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386 정치인들에게 국보법은 “약자 코스프레와 동정 구걸을 위한 의식적 액세서리로 존재할 뿐이며, 국가권력에 의해서 언제든지 저질러질 수 있는 악법이라는 문제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318쪽)

국가보안법폐지 국민행동 활동가들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2·7조 위험심판 결정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계속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싸워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2023.09.26 ⓒ민중의소리

80년대 운동권이 민중민주파(PD)와 민족해방파(NL)로 대립했지만, 어느 쪽이나 자주와 반미를 존중했다. 기득권이 된 386 정치인 대부분은 자주와 반미를 내팽겨 쳤다. 그랬으면서도 ‘민족의식’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기 위해 반일(反日)을 내세운다. 2019년 7월 1일, 일본이 한국에 대한 부분적 수출규제를 발표했을 때(8월 2일 일본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했다), 조국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남주의 시 「죽창가」를 올렸다. 저 시는 동학농민운동과 전봉준을 기리는 시인데, 동학군의 기치는 척양척왜(斥洋斥倭), 즉 서양과 왜의 문물이나 세력 따위를 거부하여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척왜면 동시에 척양인데, 왕년의 자주ㆍ반미 투사들은 척양은 쏙 빼놓고 척왜만 오지게 하는 ‘민족 코스프레’를 한다.

386 정치인과 진보를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은 한미동맹에 안보를 의지하고, 미국의 정책 기조인 신자유주의를 이념과 경제 원리로 받아 들였다. 보수 인사들과 언론은 국보법 폐지를 북한에 대한 무장해제 정도로 해석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을 파기하는 것으로까지 확대해석한다. 그런데 한미동맹에 대한 애착이라면 386 정치인과 더불어민주당도 보수 진영에 뒤지지 않는다. 이들은 “한미동맹의 본질은 결국 친일이자 친미”(99쪽)라는 것을 모르는 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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