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수경의 삶과 문학] ‘집으로 돌아간 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네 사람들』 연작소설 「회색노트」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네 사람들』 ⓒ동서문화사

곧 ‘2024 수원 인문공동체 책고집 인문/과학 강좌’가 시작된다. 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작품 읽기’ 강좌를 진행하게 되었다. 4월부터 7월까지 7회, 6권의 작품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 모임이다. 일곱 번째 강좌는 미국에 거주하는 번역가, 극작가이며 소설을 쓰는 고영범 작가의 북토크로 준비했다. 고영범 작가는 2년 전에 '삶과 문학' 칼럼으로 소개한 적이 있는 터키 작가 아흐메트 알탄의 옥중 에세이 「나는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알마 출판사」의 역자이기도 하다. 하반기에는 이경란 소설가의 진행으로 모임이 이어질 것이며, 문학 전문 기자로 노벨문학상에 관한 기사를 쓰고 책을 출간한 최재봉 작가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강좌 프로그램을 공개한 지 며칠 만에 십여 명이 신청을 했다. 먼 거리를 오가야 하는 분도 계셨고 하는 일도 다양했다. “이 팍팍한 세상에 소설을 읽는 분들이 있다니, 아름답습니다.” 온라인 모임방에서 인사를 나누던 중 한 참가자가 말했다. 두꺼운 책들을 따라 읽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우리는 '이 팍팍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 함께 소설을 읽는 생의 특별한 한 해를 보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할까. 기대와 설렘 속에 진행자로서 갖는 부담도 있었다. 그러나 강좌 첫 작품『티보네 사람들』 1부 「회색노트」를 읽으며, 이어서 2부 「소년원」을 읽는 동안, 나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것만 같았다.

193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티보네 사람들』은 프랑스 작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1차 세계대전에 4년간 종군한 뒤, 전쟁이 끝난 1922년부터 1940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연작소설이다. 1936년에 발표한 7부 「1914년 여름」으로 다음 해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40년에 마지막 8부 「에필로그」를 발표하며 대하소설 『티보네 사람들』이 완성된다.

소설은 20세기 초 프랑스의 두 가정, 가톨릭교도인 티보 가(家) 사람들과 프로테스탄트 가정 드 퐁타냉 사람들의 연대기적 이야기이며,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의 사회적 정신적 혼란과 가치의 충돌, 당시 시대 풍경에 관한 매우 사실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그중 우리가 읽을 1부 「회색노트 Le Cahier gris」는 열네 살 두 소년, 티보 가의 둘째 아들 자크 티보와 퐁타냉 가정의 아들 다니엘 드 퐁타냉이 주고받은 회색 천 표지의 비밀 노트가 자크의 중학교 비노 신부에게 발각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024 수원 인문공동체 책고집 인문 ⓒ책고집

파리 명망가 집안의 엄격한 가톨릭 교리 속에서 성장한 자크 티보는 강압적인 학교 교육에 반항하며 자신만의 세계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유령을 곁에 둔’ 불안한 소년으로 그려진다. 그런 소년 자크와 신교도 집안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믿음을 받고 자란 성숙한 모범생 다니엘의 정신적 교감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순수하고 격정적이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학교 신부 비노는 그들의 열렬한 우정을 불온한 것으로 바라보며 논란을 만드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 퐁타냉이란 소년이 프로테스탄트”이기 때문이다.

비노 신부에게 비밀 노트를 빼앗기고 분노와 모욕감에 휩싸인 자크는 고유하고 절대적인 우정과 자유를 위해 친구 다니엘과 함께 가출을 감행한다. 두 소년은 기차를 타고 항구가 있는 마르세이유로 간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아프리카의 도시 튀니스로 떠나 둘만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유에의 도취, 모험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열네 살 소년들은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 낮과 밤을 보내고, 어린 소년들의 승선을 수상하게 여긴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려다 서로를 잃어버리고, 친구를 찾아 헤매던 중 “그녀들의 치마는 더 이상 육체의 신비를 감추는 것이 못 되는” 하룻밤의 비밀스러운 경험을 갖게 되고,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둘의 우정에 내밀한 균열이 생기고, 결국 헌병에게 붙잡혀 일주일 만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회색노트」의 주요 테마가 인습과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출판사 제공 작품 해설이 있지만, 나는 탈출을 감행한 후 집으로 돌아온 소년들의 보일 듯 말 듯 한 예민한 변화에 가슴이 뛰었고, 그들의 변화가 이 대하소설 전체를 끌고 갈 거라 예감했다. 열네 살 봄날의 짧은 탈출은 비밀과 고뇌를 숨김없이 교감했던 순수한 관계를, 두 소년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된다. 성숙하고 안정적인 감성의 소년이었던 다니엘은 “난생 처음 아빠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되거나 “엄마의 얼굴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등 익숙했던 세계를 재구성하게 된다. 티보 가의 아버지는 ‘타락한’ 아들 자크가 ‘회개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립된 생활의 벌을 준다. 소년원으로 보내지기 전날 저녁, 자크 티보는 ‘유일한 사랑이자 유일한 아름다움’인 친구 다니엘 드 퐁타냉에게 유언 같은 편지를 쓰지만, 자신을 모든 곳으로부터 떼어 놓을 거기가 어딘지, 어떤 곳인지 말하지는 않는다.

“친구여, 영원히 안녕!”

『티보네 사람들』 1부 「회색노트」는 자크의 편지, 다니엘에게 남기는 (어쩌면 그때까지의 세계와 결별하는) 마지막 인사로 끝을 맺는다. 집으로 돌아온 뒤 온전히 자신만의 비밀을 갖게 된 소년들은 이전의 관계,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 2부 「소년원」, 3부 「아름다운 계절」......로 이어지는 그들의 연대기를 상상하며 책을 읽던 중,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속에 온라인 모임방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곧 첫 모임이 시작될 참이었다. 그런데 그날 준비해야 할 것을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가지러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낯선 길을 달렸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들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돌아가는 길은 더욱 험하고 멀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두 청년에게 길을 물었고,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 헤매는 동안 절을 하듯 바닥에 엎드려서 밥을 먹으며 책을 읽는 사람들, 내게 길을 알려주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두 청년 (몇 년 뒤의 자크와 다니엘처럼), 느닷없이 눈 앞에 펼쳐진 짙은 초록의 구릉 지대와 잿빛으로 날아오르는 새떼 등 이상하고 굉장한 풍경을 만났다. 비록 꿈속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내 안에 고인 뜨거운 숨을 끌어모았고, 소년 같은 열정으로 들뜨게 했다.

집으로 돌아간 다음은 집을 떠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거라는 당연한 생각을 하며 떠나올 4월의 사람들을 기다린다.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유령’을 곁에 두고 잠시 익숙했던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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