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지학의 세상다양] 인권을 아는 시대, 왜 차별과 혐오는 늘어난 것처럼 보일까

“사회 구성원들의 인권 의식은 높아진 것 같은데, 왜 차별과 혐오는 줄어들지 않나요?
줄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 그런가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아는 시대가 됐고 이야기하는 시대가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줄어들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장애인 혐오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는 것 같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강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여성과 남성처럼 서로를 혐오하는 현상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와 같은 질문도 흔하다.

질문에 대답해 보기 위해서는 질문을 뜯어서 분석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지금이 이전 어느 때보다 인권 의식이 발달한 시대라는 전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인권의 주체, 인권의 내용,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 주체 등이 종합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둘째로 여기서 말하는 혐오란 무엇인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왜 커지고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대법원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 ⓒ뉴시스

인권을 누리며 살아야 할(보장받아야 할) 인권의 주체는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 주체는 “국가”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인권 보장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인권이 침해되고 있을 때 국가에게 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시민들은 국가에게 계속해서 권리를 요구하며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래서 인권을 다룰 때 시민 정치가 필수적이다. 나의 인권과 타인의 인권을 제대로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시민이 되려면 누구나 일상에서, 제도권에서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의 인권은 세계인권선언문을 지식으로 배우는 수준으로 교과서 속이나 시험지 속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인권 교육은 시민들을 삶의 주체, 정치의 주체로 살게 하는 교육이 아닌 착한 사람을 만드는 인성교육 혹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언어, 육체, 성적 폭력)을 사용하면 안된다(처벌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폭력 예방 교육으로 만들어져 있다. 인권을 개인적인 문제로 만드는 방식이다.

두 번째로 뜯어보기로 한 “혐오”를 단순히 ‘싫어한다’는 감정의 영역으로 잘못 다루는 이들이 많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 낙인을 강화시키고 차별, 억압, 폭력을 유지하는 사회문화와 구조의 영역이 혐오다. 국가가 시민의 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 주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나의 인권이 침해될 때 국가에게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비난하기 쉬워진다. 예를 들어, 국가가 나를 원치도 않는 시기에 원치는 않는 곳에 보내서 원치도 않는 일이 시키며 강제로 군 복무를 시키는데 국가에게 이를 해결(징병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징병제를 없애거나 휴전 상태를 종전 상태로 바꾸는 등)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다. 군대 문제를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내가 처한 군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고 엉뚱한 사람을 비난하게 만듦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요원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한날한시에 모두가 똑같은 시험을 치는데 차별이 어디 있나요?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하면 어떡하나요?”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서 살기에 급급하다. 모두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오징어 게임”이 현실과 닮아있다. 승자가 독식하며 패자는 죽는다. 모두는 승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교육 시스템이 굳건하다. 입시는 평가와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한다. 입시에서 인권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생명)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배울 필요가 없다. 이 사회는 이미 공정하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못 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으로 이해, 인정된다. 누가, 무엇을 “능력”으로 규정했는지 등은 질문하지 않는다. 이 “공정 담론”은 사회 문제를 사회 문제로 여기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으로 개인의 문제로 끊임없이 치환하며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모든 사회 문제는 그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차별, 억압, 폭력의 문제를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사회 구조(법, 제도, 인식, 문화)의 문제로 인지되지 못하게 한다.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사회다. 노동자들(시민들)은 자본가들과 국가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있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그만큼의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끔 만들어진다. 또한 자신의 그런 관점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는 데 기여하고 있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인권단체 회원들이 무지개 깃발과 피켓을 들고 있다. ⓒ민중의소리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을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권력자의 관점을 그대로 내 안에 이식함으로써 그들이 사고하는대로 나도 사고한다. 노동자와 시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재벌과 국가를 걱정한다. 특권 그룹의 관점을 소수자들에게 심어주는 통치 전략이다. 노동자가 경영자의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기본값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말단 노동자까지 ‘오너 마인드’를 가지고 일하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흐름이 강화되는 속도와 방향이 인권교육이 확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시민들의 사고방식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통치전략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인권 교육이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모든 시민이 모두의 인권을 일상에서 말하고 요구하는 정치의 주체가 되려면 어떤 고민이 더 필요할까? 자신의 가지고 있는 사회적 억압과 특권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도 사회 문제의 일부임을 인지하며, 사회적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억압을 나의 일로 공감하고, 이 억압과 연결된 사회구조의 문제를 발견하는 심도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다양성훈련이 할 수 있는 역할이며 확산하여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육의 힘을 믿는다. 교육을 통해 사람은 변할 수 있으며 사회 변화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협력과 공존을 배우는 것이 공교육의 목적이 돼야 한다. 그런 공교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과 경쟁을 통한 서열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현재의 교육 제도를 끝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입시가 사라져야 한다. 입시가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려면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이는 노동문제와 직결돼 있다. 어떤 노동을 하든 모든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보편복지라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여 어느 누구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국가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직접 그 운영을 맡아야 한다. 정치는 50~60대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고소득층, 엘리트, 선주민, 남성들만의 것이 아니다. 거대 양당제를 유지하면 그들만의 정치는 계속될 것이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제도권 내 정치인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순간이 정치다. 우리의 삶을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직업 정치인들에게 맡길 순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우리가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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