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수경의 삶과 문학] “따뜻하고 화창한 아름다운 봄날”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독일에 있는 이미륵 박사 묘지(왼쪽), 전혜린 번역으로 1979년 범우사에서 출간된 이미륵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그날도 따뜻하고 화창한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연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춘추복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은 중학생 소녀들이 무리 지어 교문 밖으로 나가던 오후였다. 그해 두발 자유화가 되어 소녀들의 머리 모양은 조금씩 달랐다.

단발과 커트 머리 사이 어정쩡한 모습의 내가 긴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친구와 손을 잡고 화계사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길을 따라 하굣길 비탈길을 내려간다. 장미원이 있던 수유리에 목단 장미 줄기가 담장을 휘감으며 꽃을 피웠고, 가두로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한 정거장 위 종점에서 출발한 84번 버스에는 담장 너머 남자 중학교 소년들과 그 틈을 비집고 올라탄 여학생들로 숨 쉴 틈 없이 가득했다. 갈래머리 소녀와 나는 정류장에서 발길을 돌려 건너편 신학대학교 앞 토스트 가게로 간다.

마야코프스키, 헤르만 헤세, 파스테르나크······ 우리는 기름에 구운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으며 전혜린의 일기에 등장하는 어려운 이름들을 더듬거나, 생물 시간에 있었던 개구리 해부, 영어 과제, 구두약을 발라 반짝반짝 광을 낸 친구들의 구두에 대해 소곤대며 이따금 창밖을 기웃댄다. 뒤늦게 교문 밖 비탈길을 내려오는 소녀들과 교모를 눌러쓰고 옆구리에 책가방을 낀 소년들과 목욕탕 쪽 주택가를 드나드는 행인들이 유리창 밖으로 드문드문 보인다. 해가 지기 직전의 수유리 골짜기는 적막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엘칸토, 에스콰이아 가죽 구두가 아니라서 윤이 나지 않는 친구와 나의 구두에도 늦은 오후의 붉은 빛이 스밀 때쯤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간다.

정류장 쪽으로 몇 걸음을 걷고 있을 때 그들을 보았다. 미류나무 앞 신학대학교에서, 연푸른빛도 없는, 단지 백색의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옆 사람의 어깨에 팔을 걸고 교문 밖으로 달려 나온다. 한 줄, 두 줄, 세 줄. 네 줄······ 소년들의 미래이고 소녀들의 동경이었던 그들은 순식간에 우리 앞을 지나 대로를 향해 달렸고, 뒤를 돌아보았을 땐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종이들이 나뒹군다. 나는 길바닥에 떨어진 그것이 노랗고 붉고 검은색으로 채워졌다고 기억한다. 행인들 누구도 그것을 줍지 않았고, 친구와 나도 집어 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날, ‘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행복에 겨워 울고 있다’는 전혜린의 일기를 읽으며 먼 미래를 동경했을 내 친구 갈래머리 소녀는 훗날 그 따뜻하고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 땅바닥에 떨어진 참혹한 소식을 간직한 채 학생회관 옥상에서 몸을 던진 친구일지도 모르고, 시인이 되어 진회색 재의 시대를 증언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선생과 학생 누구도 학교 안에서는 함구해야 했던 '폭동'의 소문과 백색의 몸들이 뿌리고 간 무서운 진실 앞에 서서 나는 그 노랗고 붉고 검은 종이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1919년 경성 의학 전문학교에 다니던 청년 이미륵이 압록강을 건너 조국을 탈출해 1950년 독일 뮌헨 교외 그래펜핑 묘지에 묻힐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게 한, 그해 삼월 초하루 오후 두 시의 사건도 '따뜻하고 화창한 아름다운 봄날'의 일이었다. 농부와 사냥꾼들, 많은 젊은이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일본군은 중무장을 하고 군가를 부르며 시내를 행진했다. 열한 살 어린 이미륵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얻어맞고 쇠사슬에 묶여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농부들을 목격했고, 성문 앞에서 임금의 옥쇄가 찍힌 공고문을 보았다. 오백 년 왕조의 ‘마지막 작별의 글’(이미륵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이었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가운데 그는 선전물을 뿌렸다. 총독부로 향하는 길에서 총검이 군중을 향해 돌진했다. 비탄의 울음소리와 함께 대열이 흩어졌다. 그날의 민족 봉기는 소도시와 장터와 마을까지 전파되었다. 대학생, 중학생, 상인, 노동자, 농민, 한국인 관리들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도처에서 피가 흘렀다. 일본 경찰은 체포와 고문을 계속했고, 주민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대학생들은 지하로 잠복해 비밀 행동에 들어갔다. 이미륵은 선전물 제작 일을 맡아 활동하다가 경찰에 쫓겨 고향 해주로 내려간다. 많은 학생이 국경 밖으로 도망치다가 사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청년 이미륵은 압록강을 건넌다.

“설령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너무 서러워 말아라. 너는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주었다. 자, 얘야! 이젠 네 길을 가거라!”
-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어머니는 안개 낀 어두운 밤,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 멀리까지 아들을 배웅하며 조용히 말했고, 미륵이 만주에 머물다가 독일에 도착한 해 가을에 숨을 거두었다.

이미륵(본명 이의경. 1899년 황해도 해주 출생)은 1921년부터 독일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가 1928년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만, 곧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들을 독일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며 창작 활동에 열중한다. 1947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는 고향 해주에서 보낸 따뜻하고 정겨웠던 소년 시절과 삶의 풍경들, 시대의 변화와 신식 교육의 어려움, 일제의 침략과 탄압, 조국을 떠나 독일 생활이 시작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담은 자전적 이야기로, 그해 '독일어로 발간된 서적 중 가장 훌륭한 책'이라는 독일 문단의 호평을 받는데, 국내에는 그의 사후인 1959년에야 독일 유학 중인 전혜린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된다.

1943년 2월, 독일 뮌헨대 학생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가 백장미단의 반나치 유인물을 뿌린 뒤 체포되어 나흘 만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뮌헨대 후버 철학교수도 어린 제자들과 함께 처형된다. 이미륵에 관한 기록을 찾다가 뮌헨대 백장미 기념홀에 스승이었던 후버 교수에 대한 그의 소개 글이 담긴 팸플릿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0년 늦봄, 열다섯 살 소녀들의 마음을 흔든 백색의 대열은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들의 스승들은 제자들의 연행에 항의해 삭발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 모든 것이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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