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소픽 만민보

[만민보] 쿠팡 과로사 장덕준 어머니 박미숙 “아들이 없는데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가요”

773번째 만민보··· “쿠팡과 싸우면서 느낀건데 자식들과 부모가 함께 싸워야하는 시대에요”

경북 경산에 있는 고 장덕준 씨 부모님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어머니 박미숙 씨와 인터뷰했다. 사진은 아들의 얼굴을 새긴 목판을 사이에 둔 어머니 박미숙 씨와 아버지 장광 씨 ⓒ민중의소리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데 일상이 뭐예요?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 거예요? 우리 큰애가 있어야 일상인데, 애는 지금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2020년 10월 12일. 경북 칠곡의 쿠팡 대구물류센터에서 일했던 아들 장덕준이 스물일곱 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 박미숙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했던 덕준이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가슴을 부여잡고 떠난 뒤 박미숙의 일상은 무너졌다. 주변에선 아들의 1주기가 지나면서 “산업재해 판정도 받았는데 이제는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박미숙의 일상과 시간은 영원히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애가 셋 있는데 덕준이가 큰 애고, 두 살 터울 남동생과 14살 터울의 막내 여동생이 있어요, 어려서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집안 첫 손자여서 귀여움도 많이 받았어요. 건담 같은 로봇을 좋아해서 로봇공학과에 진학해 졸업했고, 영화랑 음악을 좋아했어요. 졸업하고 취업이 힘들어 걱정이 많았지만, 집에 손 벌리기 싫다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왔어요. 쿠팡도 그렇게 일하게 된 거에요. 대학 다닐 때부터 방학 때면 건축일하는 아빠를 따라 아르바이트도 했고, 생활비도 벌어 썼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동생들 데리고 해외여행도 갔어요, 그렇게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하는 걸 좋아했어요. 맛집을 찾아 같이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덕준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도 아빠와 맥주 한잔하면서 취업 문제를 이야기했어요. 친구 같은 아들이었고, 맞이인데도, 싹싹했던 아들이에요.”

“어디에 무얼 먹으러 가도,
동네를 걸어도 다 덕준이와 함께했던
추억이 가득한 곳이어서 이젠 아무 데도
즐겁게 다닐 수 없게 됐어요”


당시는 건축일을 함께하던 부부가 경북 경산에 나무인테리어 공방을 차린 지 1년이 채 안 됐지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었다. 그렇게 모든 게 평범하고 행복했다. 싹싹하고 친구 같던 아들이기에 추억도 많았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했던 아름답고, 행복했던 일상은 이제 영원히 사려졌다. 아들과 함께 맛집을 찾고, 함께하길 좋아했던 어머니 박미숙에게 추억은 아픔이 됐다. “어디에 무얼 먹으러 가도, 동네를 걸어도 다 덕준이와 함께했던 추억이 가득한 곳이어서 이젠 아무 데도 즐겁게 다닐 수 없게 됐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동생과 여행을 떠나 함께 사진을 찍은 고 장덕준 씨 ⓒ박미숙 제공

그날 이후 그에겐 이전과 전혀 다른 아픈 시간이 흐르고 있다. 지난 27일 그를 만나기 위해 대구를 거쳐 경북 경산에 있는 공방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열어본 카톡엔 ‘D+775’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대부분에겐 생일, 결혼, 만남 등 축복의 시간을 기다리거나, 그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지만, 아들을 떠나보낸 박미숙에겐 이전과 같지 않은 삶을 상징하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그 시간은 아픔의 시간이자, 일하다 죽은 아들을 위해서, 다시는 덕준이처럼 일하다 죽는 이들이 없게 만들기 위해 싸운 시간이었다. 그는 카톡 프로필에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라고 글귀를 새겼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쿠팡에서 일하는 아들 동료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낙숫물이 결국 바위를 뚫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로 어머니 박미숙은 전태일 열사의 책을 읽었고, 야간노동의 위험성도 공부했고, 자신처럼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자식들을 떠나보낸 이들을 만나 함께 싸웠다. 얼마 전엔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이 기획한 책 『마지막 일터, 쿠팡을 해지합니다』에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이 책은 쿠팡에서 일하며 겪은 노동자들의 피해 실태를 중심으로 서비스산업 전반에 굳어진 노동착취와 고강도 야간노동의 문제를 공론화하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그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아들의 죽음과 그날 이후 지난했던 싸움에 대해 증언했다. 어머니 박미숙은 이 책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쿠팡에서 일하는 아들 동료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이런 간절한 바람을 담아 지낸 시간이 2년이 흘렀다.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들 덕준의 방은 치우지 못한 채 그대로다. 건담 프라모델을 좋아했던 덕준이 미처 조립하지 못한 박스가 아직도 방에 쌓여있다. 덕준이 떠나고 몇 달이 지나 뒤늦게 해외 배송으로 건담 프라모델이 배달되기도 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마치 거짓말처럼 덕준만 사라져버린 현실이 계속되고,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장덕준 씨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 ⓒ박미숙 제공

“쿠팡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 마지막 합의 과정이 아직 남아있어요. 이거를 준비해가는 과정이에요.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와 함께 산재 피해를 알리기 위해 함께 활동하려고 해요. 얼마 전엔 산재 없는 세상을 주제로 전시회가 열려서 함께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기엔 힘든 상황이에요. 아들이 없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제일 견디기 힘들어요. 다른 피해 가족을 보면 다시 그 아들을 떠올려야 하는 게 진짜 힘들거든요. 아직은 솔직히 피하고 싶은 생각도 많아요. 지금은 조금씩 추스르는 중입니다. 덕준이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남은 가족에 대해 돌아볼 시간도 없었거든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밀려드는 슬픔에 잠겨있어요.”

1년 4개월만에 15kg이 빠지고,
밤새 5만보(35km)를 걸었던
아들 덕준의 힘겨운 야간 노동,
하지만 쿠팡은 강도 높은 노동이 아니라며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족을 돌아볼 시간이 없을 정도도 정신없이 싸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박미숙과 남은 가족들이 마주한 현실의 벽은 높고 두터웠다. 덕준이 쿠팡에서 일하다 죽었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인정받는 것만도 힘겨웠다. 덕준 이전에도 쿠팡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여러 명 사망했지만, 아무도 그것이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어머니 박미숙은 “우리 아들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쿠팡에서 일하다 죽은 이들이 평소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어요. 우리도 ‘과로사’라는 말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거든요”라고 말했다.

더구나 덕준을 비롯해 쿠팡에서 일하는 이들은 쿠팡에 맞서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생각했다. 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고, 무언가 말하는 이들은 불이익을 당한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산업재해를 인정받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스물일곱 살 건장한 청년은 쿠팡물류센터 야간 아르바이트로 일한 지 1년 4개월 만에 75kg이었던 몸무게가 60kg이 됐다. 오후 7시부터 하루 8시간에서 9.5시간 동안 밤새워 일했다. 4~5kg의 박스를 수없이 날랐다. 덕준이 찬 만보기에 하루 동안 걸어간 거리가 5만 보(35km 정도)에 이를 정도로 일은 힘들었다. 결국, 고된 야간노동은 덕준의 과로사로 이어졌다.

2. 지난 2020년 10월 26일 고 장덕준 씨 어머니 박미숙 씨가 고용노동부 국정감사가 열린 정부세종청사 고용부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의원들과 면담을 갖고 아들이 근무했던 스케쥴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쿠팡 사측은 유족과 면담을 거부하고 산재인정을 위한 자료 요구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어머니 박미숙과 아버지 장광이 각종 자료를 뒤져가며 덕준의 과로사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때도 쿠팡 사측은 “쿠팡의 시간당 생산량 시스템으로 인한 강도 높은 노동이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유족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발뺌했다.

과로사 판정 이후 떠밀리듯
내놓은 형식적인 쿠팡의 사과문
“아무런 구체적인 약속도
자신들이 어떤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도 없는 그런 글이 과연 사과일까요?”


이런 사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난 2021년 2월 9일 근로복지공단은 덕준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버티던 쿠팡 사측은 그제야 쿠팡풀필먼트서비스 대표 노트먼 조셉 네이든 명의로 “故 장덕준 님에 대해 다시 한번 애도와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유가족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유가족분들에 대한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겠습니다”라며 “현재 회사가 준비 중인 개선방안과 이번 근로복지공단 판정 결과를 종합하여, 근로자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지난 2020년 10월 26일 고 장덕준 씨 어머니 박미숙 씨와 아버지 장광 씨가 고용노동부 국정감사가 열린 정부세종청사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의원들과 면담을 가졌고, 아들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아버지 장광 씨는 무릎을 꿇고 의원들에게 애원했다. ⓒ뉴시스

덕준의 산재 판정은 쿠팡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 가운데 최초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어서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 주변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권한 것도 산재 판정과 쿠팡의 사과로 모든 게 마무리됐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미숙은 “과연 그게 사과에요? 유가족을 찾아와 직접 한 것도 아니고, 자기 회사 뉴스룸에 올린, 아무런 구체적인 약속도 자신들이 어떤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도 없는 그런 글이 과연 사과일까요?”라고 되물었다.

산재 판정 이후 전국을 돌면서
기자회견을 열어 쿠팡의 노동현실을 알렸지만,
달라지지 않은 덕준이 친구들의 현실


“산재 판정도 받았고, 쿠팡이 사과해 모든 게 다 마무리된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아요. 형식적인 사과문 발표 이후 쿠팡이 당시 뉴욕 상장을 앞두고 있어서 구두로 재발 방지 등을 약속하며 합의가 진행됐어요, 하지만, 이후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쿠팡이 해결 의지가 없다는 생각에 덕준 아빠와 제가 트럭에 구호를 적고, 전국을 돌며 순회 투쟁에 나섰어요. 쿠팡의 노동 현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을 돌았어요. 전국을 돌면서 한 10여 차례 기자회견을 여는 등 투쟁을 이어가자 합의하자고 쿠팡 사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논의를 시작해 지난해 7월쯤 합의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그 이후 연락을 끊었어요. 이후 지금까지 1년이 훨씬 지났지만, 쿠팡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우리가 연락해도 받지 않고 있어요.”

지금 돌아보면 아들 덕준이 사망한 이후 쿠팡의 태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들이 사망한 당일 오후 덕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출근 신청을 했는데 코로나 자가 진단을 하지 않아서 연락한다며 쿠팡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리자 당황하며 담당자는 전화를 끊었고, 잠시 뒤 ‘근무 취소하겠습니다. 다음에 근무 지원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자가 무신경하게 날아들었다. 어머니 박미숙은 “일 년 반 넘게 일했는데, 노동자를 이렇게밖에 대하지 못하는 것인지 너무 화가 났어요”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쿠팡은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만 강조하며 오로지 돈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이었다고 어머니 박미숙은 꼬집었다. 다음날 쿠팡 대구물류센터에선 인사과장과 센터장이 조문왔다. “회사 차원에서 오신 거냐?”는 질문에 인사과장도 센터장도 “개인적으로 온 것”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산재 신청을 한 뒤에도 쿠팡은 언론을 상대로는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유족들에겐 아들 덕준의 근무기록 관련 기록 등 필요한 서류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쿠팡은 내내 덕준의 죽음이 산재와 관련 없다면서 유족과의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 덕준이 사망한 지 2주가 지난 2020년 10월 26일 열린 국정감사에 출석한 엄성환 쿠팡풀필먼트서비스 전무(현 인사 담당 대표)는 “고인과 그의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지만, 쿠팡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장덕준 씨 어머니와 아버지는 트럭에 구호를 적고 전국에 있는 쿠팡 물류센터 등을 돌며 순회 투쟁을 벌였다. ⓒ민중의소리

그렇게 쿠팡 책임을 회피하면서 산재 판정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산재 판정에 시간이 걸리면서, 유가족들의 부담은 늘어난다. 생업을 이어가기 어렵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은 커진다. 그런 어려움을 사측이 노려 돈으로 합의를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산재 판정이 나와도 보상금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산재 신청을 철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모두 이기고 결국 산재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 박미숙에게 산재 판정은 아들 덕준의 죽음과 관련해 제대로 쿠팡과 대화할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 산재 판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산재 판정을 통해 아들의 죽음에 대해 쿠팡과 대화를 시작하고, 쿠팡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황당하게도 법을 어긴 게 별로 없더라구요.
겨우 찾아낸 게 야간노동자들에게
특수건강검진 안했다는 거였는데,
과태료가 10만 원밖에 안 되니
누가 지키겠어요.”


하지만, 쿠팡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바꾸는 건 산재 판정 이후에도 쉽지 않았다. 대화에 나서지 않는 쿠팡도 문제였지만, 법적인 장치도 노동자들을 보호하기엔 너무 미흡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야간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해 실시하도록 규정된 특수건강검진이다. 국제암연구소 (LARC)는 야간 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 밤을 새워 일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여러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산업안전보건법’은 시행규칙을 통해 6개월간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의 계속되는 작업을 월평균 4회 이상 수행하는 경우와 6개월간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 사이의 시간 중 작업을 월평균 60시간 이상 수행하는 경우에는 특수건강검진을 배치 전이나, 배치 후 6개월 이내에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쿠팡은 물류센터 등에서 일하는 야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특수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박미숙은 “아들이 사망한 뒤 병원에선 사전에 검진을 한 번만 했어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어요, 법 규정을 제대로 지켰다면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거잖아요”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은 규정을 어긴 사측에 한없이 관대하다. 노동자의 목숨이 걸린 일이지만, 이를 위반해도 사측에 노동자 1인당 부과되는 과태료는 10만 원에 불과하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규정이 없거나, 있어도 처벌이 약하다. 어머니 박미숙은 “노동법도 그렇고 모든 법이 사실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잖아요. 하지만, 우리나라 법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더구나 쿠팡 같은 큰 기업들은 법을 잘 알고, 변호사도 여럿 데리고 있잖아요. 쿠팡과 싸우면서 제일 속상했던 건, 쿠팡처럼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고, 노동환경이 형편없어도 그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황당하게도 법을 어긴 게 별로 없더라고요. 겨우 찾아낸 게 야간노동자들에게 특수건강검진 안 했다는 거였는데, 과태료가 10만 원밖에 안 되니 누가 지키겠어요”라고 꼬집었다.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하려는 윤석열 정부
“예방이 되지 않으니 처벌을 강화해
사고를 막자는 것인데,
기업 자율에 맞기면 해결이 되겠어요.”


이런 현실 때문에 노동자들을 지금도 일하다 다치고, 일하다 죽어간다. 일자리가 불안정한 임시직, 계약직 등 비정규직엔 이런 현실이 더욱 가혹해진다. 덕준과 같은 사회 초년생인 청년들에겐 누구나 만날 수 있는 현실이 되고 있다. 쿠팡에서 일하다 죽어간 노동자들도 대부분 임시직이었고, 덕준도 쿠팡 대구물류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청년들은 열악한 줄 알고, 불합리한 것도 알지만 견디면서 일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어머니 박미숙은 덕준 동료가 해준 “어머니! 이게 우리 밥줄이에요”라는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지난 2021년 6월 19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 사망사고 대통령 책임 촉구 합동추모제’에서 경북 칠곡 쿠팡 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를 한 뒤 숨진 고(故) 장덕준씨의 어머니 박미숙씨가 발언하고 있다. 2021.06.19 ⓒ민중의소리


“쿠팡 계열사의 고용 증가율이 높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대부분 기간제 등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은 얼마 안 돼요. 그리고, 고용 안정성도 나빠서, 신규 채용을 하면 그만큼 또 그만둡니다. 원해서 기간제로 일하는 게 아니라, 무기 계약을 피해 가려고 기간제 고용을 반복하고 있어요, 이런 과정에서 회사 눈밖에 나면 언제 잘릴지 모르니깐 회사가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위험해도 일할 수밖에 없는 거죠.”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 사업장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화하고 기업에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부과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올 1월 27일부터 시행 중이다. 노동계가 요구했던 법안에서 후퇴한 내용의 법안이지만,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에선 이마저도 약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8일 국민의힘은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관련 당정협의회’를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관련 당정협의회’를 마친 뒤 중대재해사고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 명당 산재 사망자 수)을 5년 동안 OECD 평균인 0.29명까지 낮추기 위해 노동 정책 패러다임을 규제·처벌 중심에서 자기 규율 예방책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의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 시도에 대해 어머니 박미숙은 “예방이 되지 않으니 처벌을 강화해 사고를 막자는 것인데, 기업 자율에 맡기면 해결이 되겠어요. 이렇게 되면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든 의미가 없다”며 “너무 답답한 현실”이라고 하소연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언론엔 이런 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그 역시 쿠팡과 맞서면서 언론 보도 때문에 실망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많은 언론이 덕준의 사망 초기에 관심을 보였지만, 쿠팡 사측에서 기자들을 고소하면서 보도는 위축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쿠팡 사측을 위한 홍보성 기사는 늘어났다.

커피캔을 맥주캔으로 조작해
쿠팡 노조를 공격했던 보수언론들


지난 6월엔 쿠팡 노동조합을 음해하는 기사가 보수 매체를 중심으로 쏟아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6월 30일 오후 ‘[단독] 쿠팡 노조, 본사 점검하고 대낮부터 술판 벌였다’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보냈다. 이후 조선닷컴(조선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뉴스1, 세계비즈 등이 관련 보도를 인용하며 쿠팡 노조를 비난했다. 하지만, 한국경제신문이 술판을 벌인 근거라며 공개한 사진 속 ‘맥주캔’은 ‘커피캔’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지난 8월 3일 서울 중구 언론중재위원회가 있는 프레스센터 앞에서‘열린 쿠팡 관련- 진실보도 외면하고 노조혐오, 가짜뉴스 생산하는 언론사 규탄 기자회견에서 삭제와 정정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쿠팡 노조는 지난 7월 13일 쿠팡 노조 대낮부터 술판’ 오보 보도를 한 한국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6개 사를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 신청 했다. 2022.08.03 ⓒ민중의소리

“술판이 벌어졌다고 보도한 그 모임이 있던 날 저와 아이 아빠도 방문했거든요. 우리도 음료수를 사 가서 노조원들에게 나눠줬어요. 그런데 그걸 교묘하게 꾸며서 기사를 내는 걸 보고, 물이나 음료수도 마시지 말라는 건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수언론의 기사를 보면 노조를 설립하면 회사가 망한다고 주장해요. 솔직히 저도 아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런 언론 보도를 100%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신뢰했을 거예요. 지금은 후회가 많이 돼요. 노동자들의 이런 현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은 노동자들의 여러 호소에 귀를 더 기울이게 되는 것 같아요.”

SPC 공장에서 죽어간 여성노동자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청년들
“제대로 사과해야 원인을 밝히고,
조사할 수 있는데 왜 늘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하는 건지 안타까워요.”


특히, 덕준과 같은 또래 청년들의 현실은 어머니 박미숙을 더 가슴 아프게 한다. 지난달 15일 파리바게뜨에 빵 재료를 납품하는 경기도 평택 SPC 계열 제빵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작업 중 소스배합 기계에 끼어 사망한 참사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SPC 사측에서 여성 노동자 장례식장을 찾아와 답례품으로 쓰라며 빵을 주고 갔다는 이야기를 기사로 접하곤 쿠팡 사측이 자신들에게 했던 일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사고로 숨진 여성 노동자를 ‘소녀가장’ 취급하는 기사를 접하고선 화가 났다.

“전태일 열사 책을 읽으면서 1970년대와 지금이 과연 무엇이 달라진 건지 생각하게 됐어요. 현실은 더욱 교묘해져서 일하기 싫으면 떠나면 되는 거 아니냐며 모든 게 개인의 선택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요. 아직도 가슴 아픈 건 ‘얼마나 부모가 못났으면은 택배 알바를 하냐. 부모가 얼마나 무능력하면 그런 데 애를 보내냐?’는 이야기에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열심히 살겠다고, 부모에게 손 안 벌리고, 열심히 일하는 청년들에게 너희가 열심히 안 해서 그런 일자리에 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나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물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들은 아무도 자신들의 잘못이 무언인지 밝히며 사과하지 않았다.

“이태원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누가 그곳에 가더라도 안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국가와 정부의 역할이잖아요. 우리들이 세금을 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국가의 태도를 보면서 쿠팡이 떠올랐어요. 국가도 그렇고, 쿠팡을 비롯해 많은 회사는 사고와 참사가 일어나면 왜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지 의문이에요, 쿠팡도 산재 판정이 나오기 전까진 우리 책임이 아니라며 사과하지 않았어요. 윤석열 정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제대로 사과해야 원인을 밝히고, 조사할 수 있는데 왜 늘 책임을 떠넘기려고만 하는 건지 안타까워요.”

“제가 청년 때보다 요즘 청년들이
더 힘든 것 같아요.
덕준이가 떠나고 쿠팡과 제가
싸우면서 느낀거지만,
자식들과 부모가 함께 싸워야하는 시대에요.”


일하다 다치고 죽어가고, 거리에서 축제를 즐기다가도 죽어가는 오늘의 청년들을 보며 어머니 박미숙은 가슴이 아프다. 삼십 년 전 청년 시절은 지나온 그이지만, 요즘 청년들이 자신이 살아온 시대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21년 10월 12일 쿠팡노조와 쿠팡노동자의 건강한 노동과 인권을 위한 대책위원회, 김용균재단과 함께 장덕준 씨 묘역을 찾아 1주기 추모제를 열었다. 추모제에서 아들 사진을 들고 있는 박미숙 ⓒ박미숙 제공

“저는 솔직히 요즘 청년들의 삶이 더 힘들고, 더 불안한 것 같아요.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잖아요. 제가 청년이던 시절엔 삶이 풍요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미래엔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있었잖아요. 사회가 잘못됐다고 외치면 무시하지 않고, 그래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힘들었지만 사회를 조금은 바꿔본 경험도 있잖아요.”

그런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쿠팡에서 일하기 힘들어요. 우리를 노예취급해요”라고 하소연하던 덕준에게 “너희가 불만이 있으면 싸워야지”라고 너무 쉽게 조언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된다. “지금은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노동 조건 개선을 이야기해도 경쟁에서 밀린 탓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돌려보려요. 덕준이가 떠나고 쿠팡과 제가 싸우면서 느낀거지만, 자식들과 부모가 함께 싸워야하는 시대에요. 쿠팡에 불만이 있으면 네가 바꾸라고 했던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덕준이를 사지로 몰아 넣은 거밖에 안 돼요.”

어머니 박미숙은 청년들에게 “어렵지만, 그래도 침묵하진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힘들다고 소리치지조차 않으면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 세대들도 이런 외침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호소했다. 막막하게 들리던 호소들이 덕준을 떠나보내고 나선 현실의 목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덕준을 비롯한 많은 청년이 겪은 비극이 내일 누군가에게 반복될 수 있다. 이런 비극의 반복을 막아내는 게 어머니 박미숙에겐 여전히 절실한 숙제가 되고 있다.

“예전엔 세월호 참사 등을 접하면서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왜 저렇게 절실하게 싸우는지 잘 몰랐어요.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싸움을 멈출 수 없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기사 원소스 보기

  • 등록된 원소스가 없습니다.

기사 리뷰 보기

  • 첫번째 리뷰를 작성해 보세요.

더보기

관련 기사

  • 등록된 관련 기사가 없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