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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문학: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와의 대화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 2022년 5월 ⓒ사진=뉴시스

편집자주

"개인적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통제를 드러내는 용기와 꾸밈없는 예리함을 보여주는 작가" 스웨덴 한림원이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아니 에르노를 선정하면서 덧붙인 말이다. 
자신의 삶을 솔직히 풀어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프랑스 문학의 거장 아니 에르노는 1940년 9월 1일, 노동자에서 소상인이 된 부모를 둔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를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에서 보냈고 루앙 대학교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정식 교원과 문학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자전적인 소설 『빈 장롱Les Armoires vides』(1974)으로 등단했으며,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다룬 『남자의 자리La place』(1984)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 전후부터 오늘날까지의 현대사를 대형 프레스코화로 완성한 『세월들Les Annees』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 자신이 태어나기 전, 여섯 살의 나이에 죽은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 『다른 딸L'autre fille』을 선보였고, 같은 해에 12개의 자전 소설과 사진, 미발표 일기 등을 수록한 선집 『삶을 쓰다Ecrire la vie』를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하며 생존하는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 총서에 편입되었다. 2003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벨기에 리에주 대학의 마뉴엘 세르베라-마르살 교수가 프랑스 웹진 ‘콩트르탕’을 위해 진행한 인터뷰를 소개한다. 

원문:  Écrire la violence sociale. Entretien avec Annie Ernaux

프랑스 문학의 거장 아니 에르노(1940~  )가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르망디에서 노동계급의 딸로 태어난 에르노는 사회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전적인 소설로 유명하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벨기에 리에주 대학교의 마뉴엘 세르베라-마르살과의 인터뷰에서 에르노는 노동계급 출신의 작가가 겪는 어려움, 그녀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사회학적 요소들, 개인의 경험에 대한 글에서 계급적 지배의 폭력성이 표현되는 방식 등에 대해 얘기했다.

당신은 문학을 공부하고 교수로 성공했기 때문에 충분히 당신이 성장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작품에는 당신의 성장배경은 여전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특권층 출신의 작가들과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됐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처음에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게 된 것은 나의 데뷔작 ‘빈 옷장’을 출판한 이후였다. ‘빈 옷장’ 집필 당시에는 몰랐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이다. 그때는 내 글쓰기가 전형적이지 않다는 점은 알았지만 글쓰기 자체나 내 노동계급 배경이 글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빈 옷장’을 쓸 당시에는 그것이 출판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글 쓰는 방식이 독특하다는, 비평가들의 말로는 ‘폭력적’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은 책이 출판된 다음이었다. 이후 나는 허구를 거부한 ‘남자의 자리’를 쓰면서 이런 글쓰기 방식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미셸 뽀르트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나는 스스로를 글 쓰는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 글을 쓰는 여성이 아니다”라고 했다. 당신의 성장배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가? 당신의 작품에 농부였던 조부모, 노동자였다가 소상인이 된 부모의 잔재가 있는가?


나는 항상 여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해 왔다. 물론 여성이라는 조건, 여성으로 살아가는 사회적 조건(‘본질’이 아니라 ‘조건’ 얘기다)이 나를 형성했고 내 글에서 느껴진다.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과의 관계에 일차적으로는 소작농이었던 조부모,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부모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돈이 부족하거나 돈 때문에 남에게 의존해야 할 수 있다는 두려움, 힘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 사회적 비관주의 등이 내게 있다. 이런 두려움과 불신의 일부가 나의 글과 냉담한 분석 방식에 전달된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혼자 키울 두 아이가 있었고 안정성이 필요했다.

내게는 글을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교사나 교수가 되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글을 쓸 필요가 없고, 글을 쓰고 싶을 때 자유롭게 쓸 수 있다. 1~2년 정도에 한 번씩 작품을 탈고해야 하는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다. 나는 내가 이런 제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글 쓰는 일이 나의 유일한 직업이었다면 책이 잘 팔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욕망과 물질적인 필요는 묘하게 글의 내용을 제한하는 조건이 된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지는 모르겠다.

당신의 작품이 현실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라는, 당신의 작품에 사회계급과 남성 지배의 폭력성이 날카롭게 드러난다는 얘기가 많다. 하지만 작가인 당신에게 글쓰기는 성별과 계급에서 벗어나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글쓰기는 오히려 작가를 항상 현실에 몰입하게 한다. 글쓰기가 동시에 모든 작가를 성별과 계급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평가를 보면 다시 현실에 빨려 들어간다.

요즘 (2014년에 데뷔한 매우 가난한 노동계급 집안 출신의) 에두아르 루이에 대한 평가에 매우 놀라고 있다. 어떤 인터뷰를 봐도 늘 ‘당신은 외계인이야!’라는 얘기로 귀결된다. 이상하게 그에게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루이는 내게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해 상심했다고 얘기를 한다. 나는 그가 사랑을 받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루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빌리자면 루이에게는 입장권이 없다. 글을 쓰면 정통성을 입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통성은 언제든 의심받을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교육학 박사학위가 있다는 점을 얘기해야 했다. 그것으로 정통성을 얻고 그들과 ‘같은 부류’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성별 문제는 더 복잡하다. 그것이 모든 사회계급에 걸쳐 존재하고 문학에 대한 성차별적인 평가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문학상의 경우 후보들이 모두 남성일 때도 있다. ‘단순한 열정’이 출판됐을 때 나는 ‘여성적이지 못한’ 여성 저자라는 공격과 동시에 ‘남자의 자리’를 쓴 노동계급의 배신자라는 공격도 받았다.

1997년에 출판된 ‘부끄러움’은 ‘6월의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라는 충격적인 얘기로 시작해 ‘나는 늘 출판 후 다른 사람들의 눈빛을 견딜 수 없어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들을 쓰고 싶었다’는 고백으로 마무리 된다. 부끄러움이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려는 원동력이 되는가?


당신이 인용한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내가 12살 때 경험할 수 있었던 수준으로 쓴 책에 대해 어떤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과정이다. 부끄러움에 대한 열망도 있지만 글로 표현된 부끄러움이 현실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절대로 맞먹을 수 없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온 ‘여자아이의 추억’을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입증됐다.

글을 쓸 때 매번 착각에 빠진다. 부끄러움은 작품을 쓰기 전 계획의 단계에서 느낀다. 그리고 왠지 글을 써야 하는 의무가 있어 글쓰기에 착수한다. 글을 쓸 때는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책이 출판되면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늘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수치심 때문에 죽은 적이 없다. 글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지만 글을 쓴 이후에도 남아 나를 가득 채우며 꿈틀거리는 부끄러움과 일치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은 지울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지만, 글로 쓰여졌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녹아서 타인과 공유되는 것 같다.

나는 단 한 명이라도 이해해 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쓴다. 그것이 나의 원동력이다. 데뷔작 ‘빈 옷장’을 쓸 때에는 그것이 출판될지 몰랐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극복해야 할 부끄러움이 없었다. 출판사 두 군데에서 책 출판을 제안한 후에야 내가 쓴 내용이 어떤지 갑자기 깨달으면서 망연자실했다. ‘남자의 자리’가 전환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허구 밖의 ‘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나는 입장을 바꾼 적이 없다. 나는 현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결정했다.

당신의 작품은 낙태나 가정 폭력, 대중교통을 타고 있는 익명의 군중, 혹은 슈퍼마켓의 손님들과 같이 문학이 일반적으로 무시하는 현상에 일종의 존엄성을 준다. 문학의 위계질서를 허무는 이런 방식은 정치적으로도 유효한 것 같다. 문학과 정치참여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0살이었을 때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글을 쓸 것이라고 했었다. 이미 그때부터 나에게 글쓰기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때는 노동자의 딸이 소설을 쓰면 내용을 떠나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고 아주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문화의 위계질서를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10년 후 ‘빈 옷장’을 쓰면서 나는 교육기관이 어떻게 지배층의 세계에 참여하며 피지배층의 자녀를 자기 뿌리였던 세계로부터 어떻게 떼어놓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당시 나는 교사가 됐었고, 학교에서 가해지는 문화적 폭력을 한껏 느꼈다. 내 데뷔작은 정치적인 글쓰기로 탄생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보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썼다. 나와 독자를 동시에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는 글쓰기는 상상할 수 없다.

‘빛을 바라봐, 내 사랑’은 파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세르지에 있는 트와폰텐쇼핑센터를 방문할 때마다 쓴 일기이다. 어떻게 대형마트에 대한 글을 쓰게 됐는가?


대형마트는 나를 매료시키는 장소이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이 ‘고객’이라 부르는 사람들에 대한 친숙함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나에게 고객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풍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가게 공간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채웠던 ‘상품’에 대한 친숙함도 있었다. 나는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에 유난히 관심을 가지고 1960년대의 작은 구멍가게부터 오늘날 수천 평방미터를 차지하는 대형마트까지 상업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며 그에 대한 시각을 형성했다.

상업적 공간은 추억의 장소이자 삶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정치적 의지가 개입한다. 대형마트를 흥미롭지 않은 곳이라고 폄하하는 보헤미안 브르주아(보보스)와 엘리트의 시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마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운집하는 군중과 이렇게 저렇게 되는대로 가깝게 이뤄지는 그들 사이의 접촉이다.

파리 슈퍼마켓의 대부분은 규모가 작다. 한때 저가 시장의 대명사였던 이곳이 지금은 매우 세련됐다. 대형마트는 지방이나 교외지역에서만 실재한다. ‘빛을 바라봐, 내 사랑’은 물론 부차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멸적인 가상에 대한 정치적 반응이자 모든 사회 계급이 자주 찾는 공간의 복구라는 의미가 있다. 이런 의도가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많이 읽혀지기는 했다.

오셩 슈퍼마켓의 생선 코너 앞 장면에서 당신은 “긴 꽃무늬 치마를 입은 흑인 여성이 그 앞에 잠깐 멈췄다가 망설이더니 다시 가 버렸다”고 썼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락에서 당신은 그녀의 피부색을 밝혀야 하는지 망설였다고 고백했다. 이런 딜레마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 같은가?


내가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의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면 말리 작가는 나를 ‘백인 여성’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 여성의 피부색을 밝히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두 상황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책에서는 배경이 2012년이었다) 대형마트라면 사람들은 바로 ‘그래도 그런 곳은 이민자나 이민자의 후손들만 있을 게 뻔하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는 프랑스령 카리브해 출신들도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인종차별이다.

1989년 한 오셩 슈퍼마켓에서 나이든 백인 여성이 젊은 흑인 여성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저 여자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해!” 내가 “하지만 아주머니, 저 여자는 프랑스 사람일수도 있어요!”라고 하자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알다시피 이런 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내가 히잡을 쓴 여성들에 대한 얘기를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들이 숫자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히잡을 쓰겠다는 그들의 선택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식민주의의 부활이다.

이상하게도 문학 비평가들은 ‘빛을 바라봐, 내 사랑’의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 왔다. 사실, 오늘날 사회의 다민족적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는 사람의 피부색을 언급하든 말든 함정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걱정스러운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징후이다.

당신의 작품에는 명백한 사회학적 차원이 있다. 당신은 보다 일반적인 집단적 메커니즘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은밀한 사적인 존재를 이용한다. 개인의 주관성과 사회는 어떻게 연결돼 있는가? 어떻게 ‘나’가 ‘우리’를 침해하지 않고, 역으로 ‘우리’가 ‘나’를 침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작가의 자세, ‘거리’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글을 쓰게 된 개인적, 지각적 요소에서 출발하더라도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사회학적, 역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의미에서 ‘단수’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계급을 탈피하고 계급 상승을 이룬 사람은 한 세계에서 살다가 다른 세계에서도 살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 정체성의 문제가 되면서 더 쉬울 수도 있다. 나는 열정처럼 사적인 주제도 임상적 해부에 버금가는 철저하게 객관화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내 행동과 경험이 마치 남의 행동과 경험인 듯 관찰했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 클로드 파세롱의 ‘재생산’을 1972년에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안다. 몇 년 간 글을 쓰지 않다가 집필 허가를 받는 것 같다며 글을 쓰기 시작해 2년 후에 ‘빈 장롱’을 출판한 것으로 안다. 처음에는 사회학이 문학에 영향을 미쳤지만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관계가 역전됐다. 사회학자들이 아니 에르노의 삶과 작업을 연구하려 한다.


그렇게 되어서 기쁘다. 어떻게 보면 사회학에서 나온 것이 사회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논리적이지만, 다른 의미로 말하자면 사회학이 하나의 삶 속의 다양성과 질감으로, 그리고 느껴지는 진실로 육화한 것이다. 내 텍스트는 지배 사회학의 정확성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고, 개인 경험에서 끌어낸 요소를 가져온다.

연구 프로젝트의 인터뷰 대상 중 일부는 사회학자의 펜 아래 물건 취급을 받는다고, 폭력적인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극단적인 경우 사회학자가 자기를 ‘실험실 쥐’처럼 취급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이 점에서 사회학자보다 작가가 유리하다. 독자가 작가의 책에서 자신을 발견하든 발견하지 못하든 그럴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발견이 과격할 수 있다. 내 책을 읽은 몇몇 독자는 충격을 받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느낌이 아주 컸다고 한다.

이것이 문학작품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 타인이기 때문에 독자는 서술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분석은 독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뤄진다. 그래서 사회학에서 이뤄지는 대상화는 없다. 이것이 사회학적 연구에 비해 내 작품이 가진 장점이다.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읽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이 작가에게 가장 보람 있는 일인가?


물론 그렇다. 그것은 문학이 쓸모가 있다는 증거다. 글을 쓰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가에, 누군가에게 유용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로의 유용함은 나에게 많은 의미가 있다.

계급 탈피자는 어렵거나 고통스럽기까지 한 상황에 놓일 때가 많다. 새로운 환경이 불편하고 원래 환경이 더 제자리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런 혼란이 계급 탈피자에게 특별한 세계관이나 사회적 지성을 주는가?


그렇다. 계급 탈피자는 사회 세계에 대해 더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관점을 가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계급 탈피자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선 자신이 계급 탈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수치심이나 자기 폄하 혹은 반대로 자기 장점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남을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에는 자기 처지를 모르는 계급 탈피자를 규정하는 듯한 이런 문장이 있다. “소외의 세계에서 개별적 승자는 승리한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철학자 샹탈 자케는 고의적인 배신을 내포하는 낙인성 용어인 ‘계급 탈피자’보다 ‘계급 이동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30년 전 ‘계급 탈피자’라는 사회학적인 개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이 용어를 설명해야 했을 때 이 용어가 배신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사회적 계급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성적, 상대적으로 높은 계층과의 어울림 등 개인의 결정이나 책임감과는 별로 상관없는 여러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 탈피자’가 ‘계급 이동자’로 바뀌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동자계급의 세계에서 쁘띠부르주아의 세계로 옮겨갈 때, 스스로가 ‘배신’을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남자의 자리’의 서두에 프랑스 시인 장 주네의 문구를 넣어 이것을 공식화했다. “글쓰기는 배신을 했을 때 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노동계급에 대해 쓰는 것은 당신이 남겨두고 온 사람들과의 끈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 혹은 배신을 했다는 죄책감을 없애기 위함인가? 당신의 작품이 생시몽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크고 가장 가난한 계급’에 대한 집합적 기억에 당신이 기여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되는가?


내 작품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는 사춘기 때부터 거부하기 시작한 연결고리를 다시 만들고 싶다. 일례로 어머니가 내가 다니던 사립기숙학교 교장 수녀님에게 자신이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모습이 끔찍이 싫은 적이 있었다. “수녀님, 저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아요!” 나는 속으로 ‘그렇다고 어머니가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지’라며 어머니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를 암묵적으로 사회의 최하층에 두는 문화적 지배와 위계질서를 비난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적 모욕을 존엄으로 만들고 지배받는 자가 당하는 불의를 바로잡는 것이다.

당신이 20살 정도였을 때 공책에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지배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제대로 대우해주기 위해 글을 쓸 것이라고 썼다. 글을 쓰면서 복수에 대한 열망을 잠재울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복수해야 할 사회적 고통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내가 책 몇 권을 썼다는 이유로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여러 부류로 나누는 사회적 틀과 이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의 부재 앞에서 분노와 무력감을 느낀다. 내 인생을 활용하는 모든 방법 중에서 글을 쓰는 것이 개인과 가족을 넘어서는 가장 폭 넓은 것인 것 같다. 글을 쓰는 것은 무관심과 망각의 운명에 처한 역사의 기록자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을 때 나는 내가 사회적 불평등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장소에 서 있고 거기에서 벌여야 하는 투쟁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도시 중심지에 있는 명문 학교에서 이론적인 수업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코드를 습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상 잘 알고 있었고, 늘 중소도시 외곽에 있는 학교에서 실용적인 내용을 가르쳤다.

그러나 강의 당 한두 명의 ‘기적’만 생산하는 선별제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무엇을 해도 흔들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선생님으로서 할 수 없었던 것을 글쓰기로 대신했다. 내가 그런 곳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쓴 방식으로 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쓴 책, 특히 ‘빈 옷장’을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자의 자리’에서 당신은 아버지의 죽음이 당신의 삶과 아버지의 삶, 그리고 당신의 청소년 시절 멀어진 당신과 아버지 사이의 거리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 계기였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것이 당신과 가족 사이에 벌어진 틈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얘기인데, 글을 쓰는 것이 이 틈을 더 벌리는 방법이기도 하지 않는가?


가족들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거리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족은 자기 삶에서 무언가가 고쳐지고 있다는 느낌, 책에서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내가 고등학교 졸업으로 그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한 순간부터 벌어졌다. 육체노동자와 지식인 사이의 간격을 나와 가족 모두가 느꼈다.

그런데 가족과 친척들이 나보다 먼저 그 간격을 깨달았다. 아주 친한 친척 중에서 나보다 3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타이피스트가 됐는데, 이는 블루칼라에 비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너는 대학교에 갈거야.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말도 안 하겠지”. 나는 너무 놀랐다. 그런데 결국 그녀의 말이 맞았다. 우리의 공통점이 계속 줄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감동을 받아 울면서 읽었던 책은 내게 너무 지루했고, 내가 준 책을 그녀는 너무 싫어했다. 그 당시에 나는 학교 교육의 차이에 의해 우리의 취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몰랐다. 우리는 점차 서로를 만나지 않게 됐다. 그녀는 결혼했고 나는 대학에 갔다.

내 부모님에게 내가 책을 쓴다는 사실은 내가 대학과 대학원을 가면서 생긴 격차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속하지 않는 세계, 그들이 굉장히 무지한 세계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내가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르노도상을 받았을 때였다. 나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의 심사위원장을 거치며 프랑스 문학의 대중화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인) 베르나르 피보가 진행하는 (과거 전설적인 독서 토론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프’에 출연했는데 간호사였던 또 다른 사촌이 내게 물어봤다. “너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알겠구나! 콜라로도 보니?” 스테판 콜라로는 언론인 출신의 희극인이자 배우, 프로듀서로 피보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내 사촌에게는 콜라로와 나는 같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작가가 됨으로써 어머니가 당신을 존경하도록 강요했다. 당신은 그녀가 절대로 달성할 수 없는 꿈을 성취한 셈인데, 이로 인해 어머니가 당신을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는가?


문화적 차이에 상관없이 어머니와 나는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기 전까지 평생 싸웠다. 우리는 아마 공통점이 많았을 것이다. 내가 22살이었을 때 어머니에게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고 말했는데, 어머니는 거의 얼굴을 붉히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라며 책을 쓰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13살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나를 질투하거나 미워한다는 의심이나 느낌은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머니를 지배한 것은 자부심이었다. 그 자부심은 내가 작가가 된 것이 공부와 독서를 격려하고 내게 결혼을 목표로 삼지 않게 하는 등 그녀의 교육 덕분이었다는 확신에서 나왔다.

어머니와 나 사이의 갈등은 다른 곳에 있었고, 그것은 오이디푸스적인 성격의 갈등이었다고 생각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에게 한 간호사가 내가 위대한 문학상인 르노도상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의 반응은 “그 아이는 늘 말에 재주가 있었지! 그렇지만 그 애의 아버지한테는 얘기하면 안 돼요. 그 양반은 늘 딸이라면 쩔쩔매니까요!”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소유욕이 강한 여자였고 아버지가 나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당신의 어머니는 손을 씻지 않고는 만지지 않을 정도로 책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는 책이 사람에게 좋지만 본인은 책이 있어야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당신은 책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내게 도서관은 항상 고학력층의 상징이었다. 내가 글을 깨쳤을 때부터 책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됐다. 18살 때까지는 이 욕망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책은 너무 비쌌고 공립 도서관은 일주일에 2시간만 문을 열었다. 그 2시간 동안도 나는 공립 도서관을 가지 않았다. 그곳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서점들은 있었고,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서점을 다니며 가능할 때마다 책을 사주셨다.

내가 ‘빈 옷장’에서 설명했듯, 나는 책에 파묻혀 살았다. 책은 훌륭한 지식의 원천이었고, 내 글재주를 키워줬을 것이다. 사실 나는 글재주가 있었지 말재주가 있지는 않았다. 나는 책에서 본 것처럼 글을 쓰려고 하면서도 오랫동안 말은 내 주변 사람들처럼 했다. 책의 단어들은 내게 무척 훌륭해 보였다. 자만심에 찼던 나는 가끔 잔인하게 우리 반의 친구들, 더 심하게는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단어들을 쓰기도 했다.

아주 일찍부터 현실과 내 상상 속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책을 가까이 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친숙함 때문에 나는 책에 대해 공경의 태도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읽기 시작한 책은 아무리 지겨워도 언젠가는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글쓰기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끝까지 읽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지금은 더 이상 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이 없다. 주로 소설일 때가 많은데, 책의 저자가 잘난 척한다고 느껴지거나 출판사가 그 책을 출판한 이유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때에는 주저 없이 책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20살의 나도 똑같이 잘난 척했나 보다.

아버지의 태도는 어머니의 태도와 정반대였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소설을 읽는다며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하셨고, 내가 책에 지나치게 빠져 있다고 안타까워하셨다. 아버지는 책이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셨고, 이 말은 내게 많은 영향을 줬다. 아버지에게 책이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글이 현실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신도 어머니만큼 책을 조심스럽게 다루는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는 책에 글을 쓰지 않고 책표지에 얼룩이나 지문이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책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사람이 아니면 책을 빌려주기를 꺼린다. 더러운 책을 되돌려주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책에 대해 이런 식의 예의를 갖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내용이 혐오스러우면 책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책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상징적인 제스처이다. 내가 책을 버린다고 그 책의 판매량이 달리지지는 않겠지만 그 책을 집에 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최근에 가브리엘 마츠네프의 마지막 작품인 ‘일기’를 버렸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무척 좋아했던 천주교 책이었던 ‘막다른 코끄 골목의 작은 여왕’을 다시 샀다. 노동계급 출신의 소녀에 관한 이야기였고 나는 그녀와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그 주인공과의 한 가지 구체적인 공통점이 기억났다. 나와 마찬가지로 소녀는 숟가락에 설탕을 넣어 캐러멜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었을 때 깜짝 놀랐다. 1930년대에 쓰여진 그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유대주의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재활용통이 아닌) 쓰레기통에 그 책을 버렸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사랑했던 책이 당시 내가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속도 상했다. 마치 당신의 사랑 대상이 비열한 사람임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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