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탐욕이 초래한 나비효과 _ 석유파동

[연재] 설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 ④

*편집자 주 - 지난 추석에 이어 설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무역 적자를 만회하는 제국주의의 가장 비열한 방법 _ 아편 전쟁
② 풍요와 빈곤이 동시에 시작되다 _ 산업혁명
③ 구 제국주의와 신 제국주의의 코미디 같은 대리전 _ 바나나 전쟁
④ 이스라엘의 탐욕이 초래한 나비효과 _ 석유파동
⑤ 미국, 소련 경제의 아킬레스건을 노리다 _ 소련 경제 붕괴 작전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연안에 있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대인 국가다. 이 지역을 아랍계 원주민들은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러왔다. 당연히 아랍계 원주민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꽤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

그런데 19세기 말, 유럽에서 거센 민족주의 열풍이 일었다. 이 시기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살고 있었는데, 유럽인들의 민족주의 열풍에 유대인들은 큰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고난을 겪던 유대인들은 유럽의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유대인들만의 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시온주의(Zionism)를 채택했다.

시온은 원래 성경에 나오는 성(城)의 이름이자 유대인들이 신성시 하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시온주의는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즉 유대인들이 조상들의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을 뜻한다.

이 시기 시온주의를 바탕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은 대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왔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마치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처럼 여겼다. 수천 년 동안 이곳에서 머물던 아랍 원주민들이 이를 용인할 리가 없었다.

양측의 충돌이 거세지자 국제연합(UN)은 팔레스타인 땅을 둘로 나눠 두 민족을 분리시켰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끝내 봉기를 일으켜 1948년 마침내 자기들만의 나라 이스라엘을 건국해버렸다.

영토를 침탈당한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에 참패를 거듭했다.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생각 외로 강하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배후에는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영토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56%에서 80%까지 확대됐다. 1956년 2차 중동전쟁 때에도 이스라엘은 영국 및 프랑스와의 동맹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영토는 건국 초기에 비해 무려 8배나 넓어졌다.

3차례 전쟁에서 영토를 빼앗긴 이집트와 시리아는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4차 중동전쟁이다. 하지만 전쟁 초기 잠시잠깐 밀리는 듯 보였던 이스라엘은 곧 미국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전세를 회복했다. 전황은 삽시간에 뒤집어졌고, 이집트와 시리아는 자국의 수도를 빼앗길 위험에 처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아랍을 은근히 지원했던 소련은 이스라엘을 대놓고 지원했던 미국에 휴전을 제안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 지 29일 만인 10월 25일 양측은 휴전 협정을 맺는다.

1차 석유파동


전쟁이 끝나고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이 4차 중동전쟁은 엉뚱한 방향으로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았다. 4차 중동전쟁에 참패했던 아랍 국가들이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골똘히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나 상대는 이스라엘 한 나라였고, 아랍 국가들은 여러 나라가 참전한 연합국이었다. 참패의 수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였다.

분루를 삼킨 아랍 국가들은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이미 네 차례나 참패했던 전쟁을 다시 일으키기에는 그들의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길이 바로 석유 가격을 대폭 올리는 것이었다.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는 이른바 ‘자원의 무기화’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중동지역의 석유는 대부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도 참 웃긴 일인 게, 석유는 중동에서 나는데 그 석유의 채굴권과 판매권은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중동지역 석유의 대부분을 스탠더드 오일이나 로열 더치셸, 텍사코 같은 세계적 정유회사 7곳이 좌우했다. 이들의 석유 장악력이 워낙 컸던 탓에 이들에게는 ‘7공주(Seven Sisters)’라는 독특한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참패한 중동국가들은 곧 석유가 자국의 지하자원임을 분명히 하고 이들 7공주가 장악했던 석유 채굴권과 판매권을 되찾아왔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보복조치로 석유 가격을 크게 올려버렸다. 전쟁 직전 배럴 당 2.9달러였던 석유 가격이 1974년 1월 무려 11.6달러로 4배 가까이 폭등했다.

대공황을 극복한 이후 강력한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며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미국과 유럽 경제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1974년 세계 주요 선진국들의 물가가 크게 올랐고, 경제는 크게 악화되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바로 ‘1차 석유파동’이다.

2차 석유파동, 세계의 역사를 바꾸다


세계 경제가 1차 석유파동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한국은 의외로 석유파동의 여파가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1973~1974년만 해도 한국은 석유를 많이 사용하는 공업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공업화가 일부 이뤄지긴 했어도 1970년대 초반 한국은 여전히 농업과 초보적인 경공업에 의지하는 국가였다.

그런데 1978년 세계 경제는 또 다시 석유파동이라는 메가톤급 폭탄을 맞게 된다. 1차 석유파동 이후 석유 가격의 결정권은 서구 세계의 7공주에서 아랍 산유국들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그리고 아랍 국가들은 깨달았다. 석유를 좌우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말이다.

1978년 12월 이란에서는 강성 이슬람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가 정권을 잡았다. 호메이니는 집권하자마자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원했던 서구 국가들에 대한 응징의 차원으로 석유 수출을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강공책을 꺼내들었다. 세계 석유 생산 4위 국가의 갑작스런 수출 중단 선언에 석유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단지 이란이 석유 수출을 중단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다른 산유국들도 “이 틈에 우리도 석유 수출을 줄이면 석유 가격이 더 오르겠는데?”라며 너도나도 수출 물량을 줄여버린 것이다.

서구 국가들은 당연히 애가 탔다. 이대로 가면 석유의 씨가 마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세계를 강타했다. 선진국들은 만일을 대비해 있는 석유라도 미리 잔뜩 사둬서 비축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2차 석유파동 당시 미국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 차량이 길게 늘어선 모습 ⓒ기타

안 그래도 중동에서 수출되는 석유의 양은 줄었는데, 겁을 집어먹은 선진국들이 너도나도 석유를 사재기하려 나서니 석유의 가격은 천장이 뚫린 듯 폭등에 폭등을 거듭했다. 2차 석유파동 직전 10달러 대에 머무르던 석유가격은 6개월 만에 23달러를 돌파했다. 전 세계 경제성장률은 1978년 4.0%에서 석유파동이 본격화한 1979년 2.9%로 급락했다. 반면 물가는 무려 13%나 폭등했다. 세계 경제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 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1차 석유파동 때와 달리 1970년대 후반 한국은 상당한 수준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이뤄냈다. 석유가 국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6개월만에 석유 가격이 갑절로 폭등하니 국가 경제가 폭격을 맞은 상태가 돼버렸다.

한국은 1979년 3월 석유가격을 9.5% 올린 데 이어 1981년 11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무려 337%나 석유가격을 올려야 했다. 석유 가격이 오르니 석유로 만들던 각종 화학제품 재료 가격도 폭등했다. 당연히 소비자 물가도 급등했다. 1980년 물가가 무려 40%까지 치솟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는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 1980년 한국 경제는 경제개발이 본격화한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5.2%)을 하는 수모를 겪는다.

석유파동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세계적으로는 지속가능한 복지국가의 꿈이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 시각으로는 믿기지 않지만, 당시 미국은 매우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복지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싸구려 신자유주의 국가가 된 영국도 당시에는 유럽을 선도하는 복지국가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가 나온 나라도 영국이었다.

하지만 석유 파동은 세계 경제의 틀을 두 가지 측면에서 완전히 바꿔놓았다. 하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언제라도 자원이 고갈될 수 있으니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자원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과 영국 등 석유 파동으로 곤혹을 치렀던 선진국들은 그 동안 전념했던 국민 복지에서 손을 떼고 강력한 기업을 바탕으로 한 힘의 경제 논리를 앞세우기 시작했다. ‘석유를 잃으면 모두가 망할 텐데 복지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복지냐?’는 의식이 확산됐던 것이다. 1970년대까지 복지국가의 대번영기를 누렸던 세계는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처참한 신자유주의에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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